행대(行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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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지방행정을 감찰하기 위해 파견된 사헌부(司憲府)의 대관(臺官).

개설

조선은 건국 후 관료제와 지방행정을 정비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사헌부의 대관을 지방에 파견해서 민간의 폐단, 향리의 작폐, 수령의 치적, 어량(魚梁)·염전의 조사, 주로 경기도 지역 권세가의 마필 방목 등 다양한 형태의 감찰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차츰 지방행정 전반에 대한 감찰은 관찰사에게 맡기고, 주로 사신의 왕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해 사신의 개인 물품을 검색하고, 조창(漕倉)에서의 조운곡 수납과 적재, 구휼 상황 검찰, 지방관의 회계 검사, 횡령죄나 탈점 등 주로 재정 관계 사안과 고발된 지방관의 범법 행위 조사 등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에만 행대(行臺)를 파견했다.

특히 세종대 이후에는 조운곡 수납 등 정기적인 업무 외에는 사안을 지정하거나 일단 적발된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될 때가 많았는데, 이때 사안 이외의 사실을 감찰하거나 적발하는 것은 일절 금지되었다. 이러한 행대는 품계가 낮고 감찰 활동도 지방관의 장부나 문서를 검사하는 데 치중한 것이었으므로 형식적인 감찰이 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중기 이후 어사 제도로 대체되었다. 행대는 행대감찰(行臺監察)이라고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사헌부는 시정(時政)을 논하고,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풍속(風俗)을 바르게 하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며, 남위(濫僞)를 금하는 일들을 관장하였다. 이러한 사헌부의 기능은 흔히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에 비유되었다. 그러나 사헌부가 도성 안에 설치되어 있어서 멀리 외방에 있는 외관(外官)들을 규찰하고 외방(外方) 생민(生民)들의 질고(疾苦)를 살피는 것에 어려움이 많자 태조 초기 고려시대의 행대어사(行臺御史) 제도를 습용, 감찰(監察)의 직임을 마련하여 각도에 파견하였다.

행대의 파견은 주로 사헌부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목적은 수령들이 수행하던 지방 통치 행정의 원만한 수행을 위한 것으로, 이는 지방 통치 행정에 대한 중앙정부의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통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용

감찰은 사헌부의 종6품 관직이다. 행대감찰의 주요 임무는 수령·감사 등 지방관과 토호(土豪)·향리 등 지방 세력의 불법 탐학을 규찰하는 것이었다. 조선초기 최초의 행대감찰 파견은 1395년(태조 4) 8월에 호강(豪强)들이 경기도의 한광지(閑曠地)를 불법 점유하여 목장을 만들고 농민들의 접근을 막는 등 횡포를 자행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행대로 파견되는 감찰은 1515년(태종 15)에 종전의 조참(朝叅)하지 못하던 참외(叅外)에서 조참하는 참상(叅上)으로 격상되었다. 따라서 감찰은 6품의 직사를 지낸 자이어야 제수될 수 있었다. 행대 또는 행대감찰은 바로 이 사헌부 감찰을 외방에 사신으로 파견한 것을 말한다. 사헌부 감찰의 정원은 조선초기에는 20명이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24명으로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훗날 증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행대의 파견 사례는 태조 초기부터 암행어사 출현 전인 성종대까지 보이고 있다. 태조대에는 경기좌·우도에 파견하는 방목 검찰이 관례화되어 있었고, 치해주군의 염분·어량·수량의 정세성부, 병선 및 군기의 점시 등의 목적으로 파견되었으며, 정종대 3년간에는 전시방목 검찰과 사노비 추괄, 문민 질고를 위한 파견 예도 있었다.

태종대에는 경기좌·우도 방목 검찰의 전택 탈점 조사, 부경사신 수검, 진제 감찰, 제언, 창름 검찰 등의 목적으로 행대를 파견한 예가 자주 확인된다. 이러한 행대법(行臺法)은 지방을 통제하는 좋은 법이기는 하였으나 겨우 몇 달 동안 지방을 규찰하고 서울로 돌아왔으므로 몇 달 사이에 한 방면의 수령 현부와 정치 득실·민간이병(民間利病)을 파악하기란 어려웠던 까닭에 외관들의 비리를 막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1420년(세종 2)에 부민의 수령고소금지법이 시행되면서 1423년(세종 5)부터 1433년(세종 15)까지는 행대 제도와 함께 암행찰방 제도가 실시된다. 그러나 세종조 후반기에는 암행찰방 제도가 폐지되면서 수령들의 불법 규찰은 다시 행대감찰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후반기에는 행대감찰을 여러 도에 파견하는 것이 항례화되어 있었으나 세종 말년에 이르면 행대 파견도 백성들에게 폐가 된다 하여 그 시행을 중단하고 지인(知印)을 파견하여 지방의 비위를 적간하는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초에는 사간원에서 찰방의 파견을 청하였으나, 당시에 이미 행대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중으로 찰방을 보내어 시끄럽게 할 수 없다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문종실록』 즉위년 7월 17일). 문종은 행대를 파견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의 분순어사(分巡御史) 제도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먼저 1450년 9월에는 감찰이 모두 신진으로 사무에 경험이 없었으므로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을 행대로 보내기 위해 허눌·이언에게 사헌부 장령을 겸무하게 하고, 김종순·권효량·김보지·이명민에게 사헌부 지평을 겸무하게 하는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어떠한 사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겸장령·겸지평으로 제수된 이들이 행대로 파견되지는 않았다. 아마 다음 달에 분대관(分臺官)의 설치 건의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품계가 높은 장령과 지평을 행대로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편, 겸장령·겸지평의 제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곧 분대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이어 1개월 후인 10월에는 직제학박팽년(朴彭年)이 전국을 4개 구역 즉, 경상도·전라도, 충청도·경기도, 강원도·함길도, 황해도·평안도로 묶어 4명의 분대관을 설치하기를 건의하고 있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0일). 이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3개월 후 문종은 중국의 분대어사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이의 시행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종은 분대어사의 파견을 시행하지 못하였고, 분대를 지방에 파견한 것은 1455년(세조 1)의 일이다(『세조실록』 1년 11월 7일). 당시 분대의 파견은, 행대가 짧은 기간에 순행 구역을 한번 돌아보고 서울로 돌아오기 때문에 지방에서 자행되는 불법이나 생민의 질고를 제대로 규찰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리하여 분대는 행대와는 달리 상주관서(常駐官署)로 시도되었고, 분대어사도 대감(臺監), 즉 사헌부 감찰이 아니라 집의·장령·지평과 같은 대장(臺長)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의 대장은 정원이 5명에 불과했으므로 조신(朝臣)으로 대관을 겸하게 하여 각 도에 분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분대 파견은 관질이 높은 다른 관서의 관원을 대관직에 임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장시간 한 지역에 머물면서 막대한 외관 감찰권을 행사하였으므로 종종 감사의 권한과 상충되어 관찰사와의 마찰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행대와 분대를 보완하여 고안된 제3의 대안이 조신을 어사로 삼아 수시로 파견하는 어사 제도였다. 성종조에는 대관이 아닌 강명(剛明)한 조신을 어사로 파견하면서 분대어사가 아닌 단순히 어사(御史)라 호칭되는 새로운 어사가 등장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중국으로 파견되는 서장관(書狀官)이 임시로 겸직한 사헌부의 관직인 겸대(兼臺)도 행대 혹은 행대어사라고 하였다. 겸대는 엄격한 의미에서 행대어사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 것으로 대외 관계에서만 감찰 활동을 한 관직이다. 행대어사가 초기에 국경 무역에 관여한 것이 시초였으나 그 이후부터는 대체로 국내의 지방에 대한 감찰 활동만을 한 반면에 겸대는 서장관에 임명된 관원의 품계에 해당하는 사헌부의 관직을 겸하도록 하였다.

정규 사행인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은 정5품이었으나, 진하(進賀)·사은(謝恩)·진주(進奏)·주청(奏請) 등의 임무를 겸할 때는 4품 이상으로 하였으므로, 겸대의 직명은 겸지평·겸장령·겸집의 등이 되었다. 이들 사헌부 직함을 겸한 서장관은 기록 보존이라는 본래의 업무 외에, 사신 일행의 비위를 규찰하고 불법 행위를 단속하는 임무를 띠었다.

중국에 파견되는 정규 사행은 수행원들을 포함하여 보통 300명 이상의 대집단을 이루었으므로, 사행의 규율과 품위 유지 및 국제간의 문제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일정한 감찰 활동이 요청되었다. 특히 역관들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불법 무역을 단속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이러한 이유로 서장관에게 임시 사헌부 관직을 주어 규찰 업무를 맡도록 하였다. 대간(臺諫)의 임명에는 상피제(相避制)가 적용되었으나 겸대의 경우에는 예외로 하였다. 일본에 파견하는 통신사의 경우에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으나, 서장관에 해당하는 종사관이 겸대의 일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의

조선초기 행대의 지방 파견은 외관제 운영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어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앙집권화 정책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행록선집(燕行錄選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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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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