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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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혹은 생선을 소금과 곡물 혹은 소금에 절인 음식.

개설

해(醢)는 고기 혹은 생선을 소금에 절인 짠맛이 나는 음식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의 문헌에서는 고기를 소금에 절인 육장(肉醬)을 지칭했다. 다른 말로 해자(醢鮓)라고도 했다. 어해(魚醢)는 생선을 소금에 절인 젓갈을 가리킨다. 식해(食醢)는 고기나 생선을 소금에 절인 것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쓰이다가 생선에 곡물을 넣고 소금과 향신료를 넣은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고려시대 이래 소를 임의로 도살하지 못하는 우금(牛禁) 정책을 펼치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생선을 고기라고 인식했고, 그것을 소금에 절인 것을 ‘해’로 보았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해는 생선을 소금에 절인 젓 혹은 젓갈로 이해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유교식 제사상에 올리는 식해는 반드시 육장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멥쌀로 만든 음료인 ‘식혜(食醯)’로 이해되기도 했다. 본래 ‘혜(醯)’는 고기 혹은 생선을 식초에 절인 신맛이 나는 음식이다. 식해를 젓갈로 이해하면서 식혜가 음료수로 이해되었다.

내용 및 특징

중국의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해는 육장이다.”고 했다. 『주례(周禮)』「천관(天官)」에서는 “해인(醢人)이 네 개의 두(豆)를 담당하는데, 두에 올리는 음식은 탐해(醓醢), 나해(蠃醢), 비해(蠯醢), 신지해(蜃蚳醢), 토해(兔醢), 어해(魚醢), 안해(鴈醢)가 있다.”고 적었다. 그 주석에서는 “무릇 해를 만드는 자는 반드시 먼저 말린 고기를 잘게 썰어서 여기에 기장으로 만든 누룩과 소금을 넣고 버무리고, 좋은 술에 절여서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어서 100일 동안 익힌다.”고 했다. 정사농(鄭司農)은 해는 뼈가 없는 고기를 절인 음식이라고 보았다.

조선에서는 1527년(중종 22) 최세진(崔世珍)이 편찬한 예산본(叡山本)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혜를 ‘초’, 해를 젓, 자(鮓)를 젓이라고 적었다. 특히 자는 민간에서 생선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식혜를 음료수로 이해했다.

변천

세조 때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는 생선을 소금에 절인 어해, 소의 밥통인 양(䑋)을 소금에 절인 양해(䑋醢), 돼지껍질을 소금에 절인 저피식해(猪皮食醢), 도라지와 생선을 소금에 절인 길경식해(吉莄食醢), 꿩고기를 멥쌀로 지은 밥과 밀가루에 섞어 온돌에서 삭힌 생치식해(生雉食醢), 생선이나 고기를 소금에 절였다가 찹쌀죽을 넣고 삭힌 원미식해(元米食醢) 만드는 법이 나온다. 전순의는 고기 혹은 생선 혹은 채소를 소금이나 곡물에 절인 음식을 모두 식해라고 보았다.

조선 왕실에서는 제향에 쓰이는 해를 육장으로 인식했다. 태종 때 사냥에서 잡은 짐승의 고기로 해를 만들어서 하향대제(夏享大祭)에 바쳤다(『태종실록』 12년 2월 28일). 이는 『주례』의 예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태종 때 황하신(黃河信)의 집에 쌀과 소금, 장(醬) 그리고 어해를 내렸다는 기사를 보면(『태종실록』 17년 5월 17일), 해와 어해를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세조는 공을 세운 신하에게 황어해(黃魚醢)·석수어란해(石首魚卵醢)·망어란해(芒漁卵醢)·송어해(松魚醢)를 선물로 내렸다(『세조실록』 14년 7월 10일). 여기에 나온 해는 모두 생선으로 만든 것이다.

김유(金綏)가 지은 『수운잡방(需雲雜方)』에는 어식해(魚食醢) 만드는 법이 적혀 있다. 경상도 내륙 지역인 안동에 살았던 김유는 천(川)에서 잡은 생선을 소금에 절였다가 씻어 낸 다음, 다시 그 생선에 멥쌀·밀가루·소금을 버무려서 항아리에 넣고 삭힌다고 했다. 생선에 소금과 곡물이 들어간 식해 만드는 법이다.

서유구(徐有榘)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정조지(鼎俎志)」 ‘할팽지류(割烹之類)’ 해자(醢鮓)에서 “소금과 쌀로 생선인 어육(魚肉)을 빚은[釀] 것을 해라고 한다.”고 했다.

1924년 출판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젓 담그는 법을 소개하면서 『임원경제지』의 ‘해자’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했다. “시골서 멸치식해라 갈치식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니 소금과 쌀로 만드는 것이니라. 젓이나 식해나 절이기는 한가지인 까닭에 식혜라 하고 이것이 옛 방법인 줄로 아나 이 법이 서울에서는 없어지고 소금에만 담그는 것이 짜기는 하나 매우 잘된 줄로 알았나니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서유구가 살았던 시기의 해는 소금과 쌀로 생선을 절인 식해였지만, 그 이후 서울에서의 해는 오로지 생선을 소금에만 절인 것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조선 왕실의 제향에는 육고기로 만든 해가 계속해서 등장했지만, 식사용의 해는 19세기 이후 점차 생선으로 만든 젓이 주류를 이루었다. 순조 때 서울의 각 관아와 각 도에서 약방에 바치는 물품에 감동해(甘冬醢)와 백세하해(白細鰕醢)가 나온다(『순조실록』 1년 1월 28일). 『승정원일기』에서도 정조 이후 해와 관련된 기사에는 모두 생선을 소금에 절인 젓만 나온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산가요록(山家要錄)』
  • 『수운잡방(需雲雜方)』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 『훈몽자회(訓蒙字會)』
  • 『설문해자(說文解字)』
  • 『주례(周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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