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위(海西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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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만주의 여진족을 관리하기 위하여 전략적인 요충지에 설치한 지방 군사 체제.

개설

위소(衛所)는 명나라 홍무제 때 전국의 각 군사 요충지에 설립한 군사 기구이다. 명나라의 군사 체제는 대도독부(大都督府)와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를 거쳐 위(衛)와 소(所)로 연결되었다. 원래 위소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부병제(府兵制)를 기초로 해서 원나라 때부터 시행되었고, 명나라 시기인 1384년 전국의 군사 요충지에 설립되었다. 위소는 일종의 관군(官軍) 합동의 기관인 도지휘사사에 예속되었다. 도지휘사사는 명나라 전국 18행성(行省)의 군사를 지휘하는 기구였다. 위 1개는 5개의 천호소(千戶所)로 구성되었다. 위와 소가 설치된 곳은 행정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군사뿐만 아니라 행정·경제·교육 등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위소를 중요한 곳을 지키는 국가의 방위처로 인식하였다(『세종실록』 7년 2월 25일).

그런데 만주의 해서위(海西衛)는 명나라가 설치한 일반적인 위소와는 큰 차이가 있다. 해서위(海西衛)는 평안도 강계 북쪽의 압록강 건너편 노강(老江) 위의 우위(右衛)에 위치하던 여진족의 중심지였다(『선조실록』 29년 1월 30일). 『요동지(遼東志)』를 보면 만주에는 1387년을 전후해서 위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위소들은 여진을 편입하기 위한 방안으로 설치한 것이다. 여진을 회유시켜서 위소 체제에 편입하고 만주 지역의 안정을 취하려는 정책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위와 같은 위소는 외이위소(外夷衛所) 혹은 기미위소(羈縻衛所)라고 하였다. 특히 이들 위소는 여진이 종속되지 않고 자치를 획득한 곳이다. 해서위에서는 조공과 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였으며, 명나라로서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명나라가 만주의 안정과 여진족의 회유를 위하여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명나라의 정령이 미치는 곳의 1위는 500~600명으로 구성하였고 지휘사 등이 관할하였다. 그러나 해서위와 같이 여진족의 자치가 허용된 곳은 여진족 자체의 조직으로 운영하였다.

변천

해서위에서는 몽골인의 침입으로 지휘관이 죽거나 구성원들이 밀림으로 도망가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1450년(문종 1) 12월에는 탈탈(脫脫) 병사 30,000이 해서위의 불라취(不剌吹)를 죽이고, 순종하지 않는 자도 모두 죽였다. 그러자 해서위의 나탑(剌塔) 이하 200여 명은 흑룡강(黑龍江) 등지로 도망하였다. 이 탈탈의 공격으로 해서위는 폐허화되었다(『문종실록』 1년 1월 22일). 만주의 또 다른 위소인 건주위(建州衛)에서는 탈탈의 해서위 약탈을 전해 듣고 강계의 만포(滿浦)로 도망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1년 8월 9일). 그런데 세조대에 이르러 해서위가 다시 부흥하였다. 1467년(세조 13)에 해서위는 1,000여 명의 군사로 조선과 상대하는 규모로 강성해졌다(『세조실록』 13년 3월 23일). 이들은 건주위와 합심하여 자주 조선을 침략하였다(『성종실록』 5년 2월 23일).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2: 조선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1995.
  • 남의현, 『명대 요동 지배 정책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2007.
  • 유재춘·남의현·한성주, 『근세 동아시아와 요동』, 강원대학교 출판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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