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생(解生)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유재란 당시 조선으로 파견되어 종군한 명나라 장수.

개설

해생은 1597년(선조 30) 7월 흠차비왜좌익부총병(欽差備倭左翼副摠兵)서도독첨사(署都督僉事)라는 직함으로 조선에 왔다. 직산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남원과 상주 등지에 주둔하였다. 대구 등지로 파견되어 일본군을 격파하였고, 도산성(島山城) 전투에도 참가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다. 해생은 몽고 계열의 장수로 파귀(頗貴)·양등산(楊登山)·파새(擺賽)와 이름을 나란히 하면서 사장(四將)으로 불렸다.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겸손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도 알려져 있었다. 1599년(선조 32) 8월에 귀국하였다.

가계

활동 사항

1597년(선조 30) 일본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에서는 경리(經理)양호(楊鎬)와 총독(總督)형개(邢玠), 제독(提督)마귀(麻貴) 등으로 하여금 조선으로 출병하게 하였다. 해생은 이해 7월, 부총병(副摠兵)으로서 대동(大同)의 마병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선조는 당시 명군 장수들에 대하여 접견례를 자주 행하였다. 해생은 몽고 출신의 달자였지만 부총병이라는 비교적 높은 직급에 있었으므로 자주 만남을 가졌다. 선조는 1597년(선조 30) 7월 15일에 처음으로 해생을 접견했다(『선조실록』 30년 7월 15일). 또 같은 달 20일에는 선조가 다례(茶禮)와 주례(酒禮)를 베풀었고, 예물까지 전달하는 등 극진히 대접하였다(『선조실록』 30년 7월 20일). 해생이 이끄는 명군 2천여 명이 직산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돌아온 같은 해 9월에도 선조는 해생을 방문하여 주례를 행하고 예단(禮單)을 전달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25일). 같은 해 11월에는 남원으로 재차 남하했다가 돌아온 해생을 또다시 방문하여 접견례를 행하였다(『선조실록』 30년 11월 16일). 이듬해 1월에는 선조가 울산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패전하고 상경한 해생의 관사를 방문하여 그를 위로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1월 27일).

해생은 조선에 들어와 많은 전공을 세운 장수였다. 1597년(선조 30) 8월, 일본군이 남원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북진하자 경리양호와 제독마귀는 부총병해생(解生)으로 하여금 이들을 차단하게 하였다. 해생은 우백영(牛伯英)·양등산(楊登山)·파귀(頗貴) 등을 이끌고 남하하여 직산의 소사평(素沙坪)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직접 2개의 일본군 수급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일본군의 구원부대가 몰려왔으므로 이들은 퇴각했으나 이 전투는 일본군의 북상이 좌절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선조실록』 30년 9월 9일) (『선조수정실록』 30년 9월 1일).

이후 해생은 상경하였으나 일본군이 여전히 남원·임실 등지에 잔류하고 있었으므로 다시 내려갔다. 이때 제독마귀는 부총병이여매(李如梅)와 해생 이하 직산 전투에 참가했던 4명의 장수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남하하여 주둔하도록 했다(『선조실록』 30년 10월 6일). 해생은 이여매의 중군(中軍)으로서 남원 일대에 주둔하다가 제독마귀의 전략에 따라 이방춘(李芳春)·이여매 등과 별도로 남하하였다(『선조실록』 30년 10월 29일).

해생은 잠시 상경하였다가 재차 남하하여 1597년(선조 30) 12월에 울산의 도산성(島山城) 공격에 참가했다. 조·명연합군의 공격은 인근 일본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좌절되었고, 해생의 접반사였던 호조 참의송순(宋諄)이 그와 떨어질 정도로 다급한 전황이 전개되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1월 14일). 그러나 해생의 전공은 인정되어 감찰어사진효(陳效)가 상을 베풀어 그를 위로하고 다시 전공을 세우도록 장려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2월 1일). 전략상의 실수와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상호 지원으로 패전했지만 해생의 용맹은 인정하였던 것이다.

같은 해 2월, 제독마귀는 일본군이 대구에서 약탈을 자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문형개, 경리양호와 상의하여 해생으로 하여금 정예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선조실록』 31년 2월 29일). 그리고 양호는 조선과 명 연합군을 동원하여 남해안 일대의 왜성(倭城)에 나누어 주둔하는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해생은 이때 상주에 주둔하였는데, 4월에는 5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합천에서 2백 명의 일본군을 격파하고 72개의 수급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150여 명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또 이어 거창에서도 일본군을 공격하여 1개의 수급을 획득하였다(『선조실록』 31년 4월 3일).

이때 경리양호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병력을 배치하여 조선인을 보호하는 한편, 일본군을 압박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명군은 총 4개의 방면으로 진출하여 주둔했는데, 해생은 동로(東路)에 속하여 의흥에 주둔하였다(『선조실록』 31년 3월 29일). 이해 11월에 시작된 작전에서 해생은 많은 전공을 세웠고, 특히 용왕당(龍王堂) 승첩에서는 으뜸가는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되었다(『선조실록』 31년 12월 21일).

이 전투 이후 선조는 재차 해생을 방문하여 그를 위로하여 공적을 치켜세웠다. 당시 조선에서는 명군의 주둔과 철수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는데, 선조는 해생이 잔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해생은 자신의 공로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선조실록』 32년 2월 4일). 경리양호의 후임으로 조선에 들어온 만세덕(萬世德)은 해생 등을 잔류시킬 예정임을 밝히기도 했으나, 명군 주둔의 가장 큰 문제는 군량의 조달이었다. 결국 이해 7월 해생은 귀국이 결정되었고, 선조는 그에 대한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선조실록』 32년 7월 5일). 그리고 선조는 그달 16일에 해생을 다시 방문하여 위로하고, 해생도 다음 날 답례하는 등 아쉬움을 표했다(『선조실록』 32년 7월 16일) (『선조실록』 32년 7월 17일). 해생은 8월에 귀국하였다.

해생은 조선에 들어와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로 선조는 물론 조정의 후한 평가를 받았다. 당시 선조는 낮은 직급의 명군 지휘관들도 접견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지위에 맞지 않는 무례한 행동을 하는 인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해생은 선조가 접대할 때마다 고개를 숙였을 뿐만 아니라 엎드려 술잔을 받고 절을 한 뒤에 일어서는 등 깍듯한 행동을 한 인물이었다. 신흠(申欽)은 그에 대해 ‘전투에 앞장서고 부하들을 엄히 단속했을 뿐만 아니라 공손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