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감영(咸鏡監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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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지방을 관할하던 함경감사, 즉 관찰사가 거처하며 업무를 보던 관청.

개설

함경감영(咸鏡監營)은 1416년(태종 16) 함흥부윤이 관찰사를 겸임하게 되면서 함흥에 처음 설치되어, 함경도의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기능을 하였다. 중간에 일시적으로 영흥으로 옮긴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함흥에 소재하며, 함경도 22~25개의 군현을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23부제의 시행과 함께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함경도는 고려시대에는 삭방도(朔方道), 동계(東界), 동북면(東北面) 등으로 불렸다. 1178년(고려 명종 8)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렸는데, 지금의 강원도 지방 일부를 포함하였다. 원(元)나라가 침입해 오면서, 1258년(고려 고종 45) 화주(和州) 이북의 땅이 원나라로 넘어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유인우(柳仁雨)가 수복한 뒤 다시 동북면,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 삭방강릉도 등으로 불리다가 공양왕 때에 비로소 강릉도(江陵道)와 분리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관찰사 제도는 확고하게 정착되지 못하였다. 즉 양계(兩界)에는 관찰사 대신 도순문사(都巡問使)가 파견되었고, 나머지 6도에도 1392년(태조 1) 건국 이후 1401년(태종 1)까지 몇 차례나 안렴사(按廉使)로 환원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함경도 지방은 1413년(태종 13)에 영길도(永吉道)라 고쳤고, 1416년에 함주(咸州)가 함흥부(咸興府)로 승격되어 관찰사가 부윤을 겸하게 되면서, 감영이 설치되고 도의 이름을 함길도(咸吉道)라 하였다. 평안도와 함길도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파견되면서 비로소 전국 8도에 일률적인 관찰사제가 확립되었다. 이후 1498년(연산군 4)에 도의 이름이 함경도로 개칭되었다(『연산군일기』 4년 4월 4일).

조직 및 역할

문관 종2품의 관찰사 1인이 함경도의 행정과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다. 임기는 2년이며,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겸임하였다. 감영에는 관찰사에 직속된 비장(裨將) 8명, 화사(畫師) 1명, 토관(土官) 231명, 영리(營吏) 18명, 지인(知印) 79명, 나졸(羅卒) 84명, 노(奴) 134명, 비(婢) 111명이 있었다. 관찰사 밑에 1년 임기의 문관인 도사(都事) 1인을 두어 관찰사의 행정 업무를 보좌하게 하였다. 1485년(성종 16) 『경국대전(經國大典)』 당시에는 종5품이었는데, 조선후기 영조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종3품으로 나온다. 도사가 관찰사의 행정 업무를 보좌한다면, 중군(中軍)은 관찰사의 군사 업무를 보좌하였다. 임기는 30개월이고, 무관 정3품으로 보임하였다. 관찰사가 임명하다가 1604년(선조 37)부터 왕이 낙점(落點)해 보냈다. 중군에 직속된 병방군관(兵房軍官) 2명, 장무관(掌務官) 2명, 훈도(訓導) 3명, 진무(鎭撫) 68명, 지인 21명, 군뢰(軍牢) 49명, 마두(馬頭) 2명이 있었다.

감영에는 서울의 담당 관사에서 뽑아 보내는 15개월 임기의 심약(審藥)과 검률(檢律)이 있었다. 심약은 궁중에 헌납하는 약재를 심사·감독하는 종9품 관원으로 전의감(典醫監)이나 혜민서(惠民署)의 의원(醫員) 중에서 선임하였고, 검률은 법률의 해석과 인용, 적용 법조의 확정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던 종9품 관원으로 형조(刑曹)에서 파견하였다. 이 밖에 함경감영에는 24개월 임기의 역학(譯學)이 있었는데, 사역원(司譯院)에서 파견하였다. 1712년(숙종 38)에 청(淸)나라의 목극등(穆克登)과 국경을 정할 때 처음 두었다.

관찰사의 기능으로는, 첫째 관할 아래에 있는 외관(外官)의 규찰, 둘째 지방 장관으로서의 행정적·군사적 기능을 일반적으로 거론한다. 함경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경도에는 관찰사가 겸임하는 종2품의 부윤(府尹) 1원, 정3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1원,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 11원, 종4품의 군수(郡守) 5원, 종6품의 현감 4원이 있었다. 원래 함흥에 설치되었던 감영이 『경국대전』 편찬 당시에는 영흥(永興)으로 옮겨져, 영흥부윤이 감사를 겸임하였다. 대도호부사는 안변(安邊)에 설치되었고, 도호부사는 경성(鏡城)·경원(慶源)·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흥(慶興)·부령(富寧)·북청(北靑)·덕원(德源)·정평(定平)·갑산(甲山)에, 군수는 삼수(三水)·문천(文川)·고원(高原)·단천(端川)·함흥에, 현감은 홍원(洪原)·이성(利城)·길성(吉城)·명천(明川)에 설치되었다.

남쪽 지방의 다른 도와 달리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관직인 현령과 현감이 적은데, 이는 군사적 기능이 중시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평안도보다도 함경도에 상대적으로 높은 관직인 도호부사 이상의 비율이 높았던 이유는 조선왕조의 발상지가 함경도이고, 목조(穆祖)에서 환조(桓祖)에 이르는 조종(祖宗)의 능이 분포하고 있었던 지역인 데서 연유한다.

감사는 감영에 주재하는 동시에 왕의 특명을 받은 사신으로서 끊임없이 도내를 순력하면서 1년에 두 차례씩 수령을 비롯한 모든 외관에 대한 성적을 평가,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감사는 중앙의 내헌(內憲)인 사헌부(司憲府)와 더불어 외헌(外憲)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외관을 규찰하는 동시에, 외관의 상급 기관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특히 감사는 일반 행정 업무 외에도,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겸임하여 군사적 기능도 수행하였다. 경성에는 북병영(北兵營)이, 북청(北靑)에는 남병영(南兵營)이 각각 설치되어 감사와 함께 함경도의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변천

함경감영의 위치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함흥 사람인 이중화(李仲和) 등이 반란에 가담하고 관찰사 등을 살해했다 하여, 1470년(성종 1)에 함흥을 군(郡)으로 강등하고 영흥을 부(府)로 승격시켜 관찰사의 본영으로 삼고 도(道)의 이름도 영안도(永安道)로 고쳤다(『성종실록』 1년 2월 17일). 1498년(연산군 4)에 다시 함흥부로 감영을 옮기고 함경도의 이름을 회복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4월 4일). 영안도에서 함경도로 이름이 바뀐 시기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전하(殿下) 4년’ 즉 1509년(중종 4)으로 오해할 수 있게 표현되었고, 이것이 『여지도서(輿地圖書)』로 계승되어 ‘중종 4년’이라 표현되었는데 이는 오류이다. 1755년(영조 31)에는 관찰사가 부윤을 겸하는 규정이 폐지되었다가 1757년(영조 33)에 회복되었다.

함경감영이 관할하는 군현의 수효와 품계도 시대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경국대전』 당시 22개였던 함경도의 군현은 1746년(영조 22) 『속대전(續大典)』 단계에서 수효는 변함이 없지만, 각 고을 수령의 품계가 조정되었다. 즉 함흥의 읍호가 회복되면서 군수에서 부윤으로 승격되는 대신, 부윤이었던 영흥은 대도호부사로, 대도호부사였던 안변은 도호부사로 각각 강등되었다. 현감이었던 길성은 길주(吉州)로 바뀌어 정3품 목사로 승격되었다. 또 군수였던 삼수·단천과 현감이었던 명천이 각각 도호부사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1부윤, 1대도호부사, 1목사, 15도호부사, 2군수, 2현감 체제로 바뀌었다. 1785년(정조 9)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무산(茂山)이, 1865년(고종 2)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장진(長津)과 후주(厚州)가 각각 신설되어 도호부사가 되었다. 이에 따라 함경감영이 유지되던 조선말기까지 함경도는 1부윤, 1대도호부사, 1목사, 18도호부사, 2군수, 2현감 체제로 모두 25개 군현이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대구역주의인 8도제가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