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훈도(漢學訓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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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원(司譯院)과 황주·평양·의주에서 생도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친 관리.

개설

고려 충렬왕대에 중국어 교육을 위해서 설치한 통문관(通文館)은 공양왕대에 한문도감(漢文都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조선 건국 후 1393년(태조 2)에 사역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태조실록』 2년 9월 19일). 1394년(태조 3)에 몽골어 교육을 추가하였고, 같은 해에 사역원 제조설장수(偰長壽) 등이 글을 올려 한학교수는 2인, 몽학교수는 1인으로 하기를 청하였다.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어, 여진어 과정도 차례로 두었다.

1466년(세조 12)에 있었던 관제 개편에서 한학은 교수 2명, 훈도 4명을 두며 몽학·왜학·여진학은 훈도를 각각 2명씩 둔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학훈도(漢學訓導) 4명은 사역원에서 생도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훈도 1명과 명나라 사신이 오고 가는 중요 길목인 의주·평양·황주에 각각 훈도 1명씩을 두었다. 한학훈도의 임기는 1473년(성종 4)에 외국어 교육의 효과가 보이도록 15개월에서 30개월로 늘렸다. 이 조치는 군현 훈도의 임기와 같게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다른 몽학·왜학·여진학 훈도도 30개월로 임기가 늘어났고, 황주·평양·의주의 한학훈도, 제포·부산포의 왜학훈도 또한 임기가 똑같이 늘어났다.

담당 직무

1485년(성종 16)에 『경국대전』이 반포될 때 한학생도 인원이 규정되었다. 사역원에는 35명이고 평양·의주·황주는 각각 30명이었다. 그러다가 1506년(연산군 12)에 사역원 한학교수 1원, 한학훈도 1원이 일시 줄어들었다가, 추후 복구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학훈도의 기본 직무는 중국어 교육이었다. 교재는 『사서』, 『노걸대』, 『박통사』, 『직해소학』이었다(『성종실록』 2년 5월 19일). 한학의 경우 다른 세 전공과 달리 잡과에서 측정하는 시험이 역어(譯語) 과목만 있고 사자(寫字) 과목은 없었다. 역어는 해당 언어로 옮겨서 말하는 시험으로 현대적인 의미로 한다면 회화 능력을 판단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몽학·왜학·여진학의 경우 사자는 교재의 내용을 암송하여 쓰는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에 교재 내용을 외워 언어 환경에서 익숙하게 구사하는 것이었다. 4개 전공 시험 모두 『경국대전』을 앞에 두고 해당 외국어로 번역하게 하는 시험도 부과하였다.

중국어 교육은 한이과(漢吏科)라 하여 중국어를 뜻하는 한학과 중국 행정 기록에 쓰이는 독특한 문어체인 이문(吏文)에 고루 능통할 것을 권장하였다. 실상은 두 가지에 능통한 문신이나 역관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미 세종대에 한학과 이문에 둘 다 익숙하도록 권장했지만 승문원의 젊은 관리와 생도들은 이문을 익히고, 사역원에서는 중국어를 학습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말았다. 유학을 배워 등과한 승문원 관리는 자신들이 역관들과 어울리는 것을 비천하게 여겨 역학을 즐겨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에서는 생원·진사 출신으로 습독관을 삼아 중국어 학습을 권장하고 젊은 문신을 북경 사행에 보내어 효과를 보려고도 했다. 또한 사역원의 한학훈도를 문관이 겸하게 해서 의리의 학문을 익히게 했으나 실상 그 문관이 본업에 얽매이고 중국어는 아예 몰라서 효과가 크지 않았다.

왕이나 신료 모두 사대를 중시하여서 젊은 문관들에게 중국어를 익히는 것을 강조하였다. 세종대는 통사를 요동으로 보내거나 명나라에 유학 보내는 방법을 강구하기도 했고, 이미 혀가 굳은 집현전 학사들을 사역원으로 보내 중국어를 학습시키려 했다가 그만둔 적도 있었다.

4학의 훈도들이 전직 관함이 아니라 현직 또는 행직(行職)으로 교수나 훈도를 겸하여 교육하도록 했고, 학습 효과가 있으면 분수를 기록하여 승진의 혜택을 주도록 하였다. 세종대에는 한학·몽학·왜학의 생도들이 모두 지방 출신이었으므로 날마다 한 끼씩을 먹여주도록 하였다. 외국어를 가르치고 현직 역관들을 권장하기 위해 녹취재(祿取才), 부경취재(赴京取才), 위직취재(衛職取才) 그리고 서도고강(書徒考講), 26고강(考講)의 제도를 시행하였다. 녹취재는 1년에 두 번 응시해서 6개월간 녹미를 받고 6개월은 무록관으로 근무하는 것이고, 부경취재는 명나라 사행에 가기 위한 본업을 점검받는 시험이었다. 서도고강은 어전교회, 교회전함, 연소총민, 우어별차를 대상으로 중국어 실력 및 『사서』나 『통감절요』와 같은 과목을 시험 보여서 우수자에게 해당 직과의 위직 또는 연행의 기회를 주었으며, 26고강은 한 달에 2일과 6일이 드는 날에 최고위 역관인 훈상당상(訓上堂上)이 생도에서 상통사까지 실력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제도상으로는 권장책 내지 포폄의 수단이 있었지만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소수의 어전통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상대방의 곡절까지도 제대로 전달하는 통역이 못 되는 것을 조정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잡과 시험에서 문관들이 해당 언어를 몰랐기 때문에 역관 출신의 시관에게 평가를 맡기고 만다는 지적도 있었다.

변천

임진왜란으로 인해 인명 피해가 막심하고, 생산 기반이 붕괴됨에 따라 사역원 운영도 재정 긴축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정9품 역학훈도 10인 가운데 몽학·왜학·청학은 모두 2명으로 변함이 없었으나, 한학은 1605년(선조 38)에 1인이 줄어서 3인으로 되었다가, 1643년(인조 21)에 복구하였다. 역관의 운용 체계로 본다면 훈도가 중국어 교육을 전담한 것은 아니어서 1인의 감소가 교육에 지장을 준 것은 아닐 듯하다. 역관이 담당한 교수 2인은 한학 전공이었으며, 훈상당상 이하 종9품 참봉 가운데서도 교육을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종대에 젊은 자제를 명나라로 보내어 교육하려고 했다든가 문관 관리에게 이문과 중국어를 권장하기도 했지만, 중국어 교재 자체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조정의 대응 방식은 현지 언어의 변화에 대응하는 교재를 개편하는 것보다 몇몇 뛰어난 역관에게 중요한 외교 현장을 전담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1682년(숙종 8)에 사역원에 설치된 우어청(偶語廳)에서는 민정중(閔鼎重)이 도제조에 있으면서 현지인 또는 포로로 붙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을 훈장으로 삼아 일상 회화로 학습을 권장하였다. 중국어 훈장은 문가상(文可尙)·정선갑(鄭先甲)이 맡았는데, 이들은 명나라 관리 출신으로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있을 때 조선에 들어왔다. 이 방법은 현지인에게 생생한 중국어를 배울 수 있어 자못 성과가 있었다.

『경국대전』에 실린 조선전기 중국어 학습서는 『노걸대』·『박통사』등이었고, 영조대의 『속대전』에서는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오륜전비(伍倫全備)로 대체하였다. 시험 방식은 교재를 보지 않고 암송하는 것이었다. 고종대의 『대전회통』에서는 오륜전비를 다시 역어유해(譯語類解)로 대체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통문관지(通文館志)』
  • 小倉進平 著, 河野六郞 補注, 『增訂補注 朝鮮語學史』(復刻版), 西田書店, 1986.
  • 송기중, 「역학서」, 『노걸대·노걸대언해』,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이상규, 「17세기 왜학역관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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