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체(韓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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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石峯) 한호(韓濩)의 서체.

개설

한호는 주로 16세기에 활동한 명서가(名書家)로 그의 서풍을 한석봉체(韓石峯體), 석봉체(石峯體), 한체(韓體) 등으로 지칭한다. 조선중기 서예사에서 한호는 앞 세대로부터 풍미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서풍에서 벗어나 왕희지체(王羲之體) 등 고법의 회복으로 새로운 조선식 글씨를 이룬 서가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성실한 수련을 통해 사자관(寫字官)으로 입신한 노력형 명필로도 알려져 있다. 세간에서는 이러한 그의 독실한 노력을 떡장수 어머니와의 솜씨 겨루기로 대변하곤 하는데, 이 이야기는 그의 고향 송도(松都 : 현 개성) 일대에 구전된 전승(傳乘)을 명인 설화로 각색한 허구에 불과하다.

내용 및 특징

이정구(李廷龜)가 쓴 한호의 행장에는 그가 왕희지로부터 글씨를 받는 꿈을 꾼 뒤 왕희지의 필적을 열심히 학습하여 액서(額書), 진서(眞書), 초서(草書)에서 그 묘(妙)를 이루어냈다고 하였다. 이정구의 언급과 같이 한호는 전아한 풍격의 왕희지체를 숭상한 동시에 호방한 기세를 보이는 당(唐)의 장욱(張旭)과 회소(懷素) 등도 애호하였다. 그러나 원(元)·명(明)의 서예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적이었는데, 특히 조맹부나 그를 추종한 문징명(文徵明)의 서예에 대해서는 한 구절의 언급도 없는 반면, 명의 축윤명(祝允明)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역대 서법에 대한 입장은 그의 문학적 취향과 같이 왕세정(王世貞) 등의 명대 서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한호는 3차례의 원접사행(遠接使行)과 2차례의 주청사행(奏請使行)을 통해 명조인(明朝人)에게 필명을 떨쳤고, 이로 인해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들이 그의 글씨를 구해 가곤 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그 가운데 1582년 반황태자탄생조사(頒皇太子誕生詔使) 황홍헌(黃洪憲)을 수행하여 입국했던 급사(給事) 서관란(徐觀灡)이 한호의 글씨를 구하자 고인(古人)의 서체를 본떠 10폭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당시 베낀 글씨가 장지(張芝)·왕희지·왕헌지(王獻之)·저수량(褚遂良)·구양순(歐陽詢)·지영(智永)·안진경(顔眞卿)·미불(米芾)·조맹부와 신라김생(金生)의 것이었음을 보면 한호는 역대 명가의 글씨를 매우 폭넓게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한호의 필적으로는 진적(眞蹟), 비갈명(碑碣銘), 간본(刊本) 등이 다수 전한다. 그중 진적은 모두 서첩이며 몇몇 공신교서를 제외하고는 축(軸), 권(卷), 병풍 등의 대작은 전하지 않는다. 비갈명은 30점에 달하고 간본은 20여 종이며, 그 밖에 일부 편액과 그의 필적을 베낀 임모작(臨摹作)도 전한다. 서체는 해·행·초서이며 전서와 예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서체별로는 1580년경부터 해서로 쓴 비갈명이 보이지만 노년 시절과 큰 차이가 없으며, 행·초서 또한 대부분 노년작으로 시기별 변화가 적은 편이다. 다만 해서나 행서에 비해 초서에서 좀 더 다양한 서풍이 보인다.

한호의 해서는 1583년(선조 16) 부사과(副司果) 재직 시 왕명으로 쓴 『석봉천자문』으로 대표된다. 이 글씨는 그해 초간되었고, 이후 부분 교정되었으며, 1601년(선조 34) 내부에서 개간되었다. 초간본으로 1583년 7월 선조가 대사간박승임(朴承任)에게 하사한 것이 경상북도 영주의 후손 댁에 전한다. 또 일본의 국립공문서관에는 초간본과 관지(款識)와 판식(版式)은 동일하나 천자(千字) 아래의 한글 음훈(音訓)이 일부 다른 교정본도 전한다.

한호의 액서, 즉 대자해서는 원(元)나라설암(雪菴)의 서풍을 따랐다. 한호는 왕희지체를 배우기 전에 ‘예학명(瘞鶴銘)’이란 중국 남조의 마애각석(磨崖刻石)을 배웠다. 그러나 이 필적은 마멸이 심해 남은 글자가 적고 짜임이 변화로워 엄정한 필법이 요구되는 제서(題書)나 편액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또 왕희지를 위시한 고법에는 대자필법이 따로 없었으므로 설암과 같은 후대의 대자서풍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설암의 서풍은 안진경과 황정견(黃庭堅)의 글씨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그의 필적은 고려말에 전해졌고 조선초에 이르러 『춘종첩(春種帖)』·『병위삼첩(兵衛森帖)』 등이 간행되면서 유행하였다. 한호의 대자해서로 『대자천자문(大字千字文)』을 대표작으로 꼽는데, 설암의 『춘종첩』과 한호의 『대자천자문』은 위아래로 긴 자형, 점획 사이의 긴밀한 짜임, 규각(圭角)과 파세(波勢)가 강한 점에서 서로 매우 닮았다.

한편 경기도를 중심으로 18세기에 세워진 묘갈(墓碣) 가운데 앞면의 제서(題書)를 『대자천자문』으로 집자한 예가 다수 전한다. 이들 묘갈의 명문 끝에 ‘전면집한호자(前面集韓濩字)’라 밝혔는데, 이런 집자의 예가 한호 생존 때나 사망한 뒤 17세기까지는 보이지 않다가 18세기 숙종 연간 후반부터 영조·정조 연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이후 안진경·유공권 등 해서 필적으로 묘갈명을 집자하는 풍조가 생겨나면서 전면 제자로 『대자천자문』을 애용했던 것으로 본다. 한편 한호가 대자로 쓴 편액이 다수 전한다. 강한 근골을 나타내는 사례로 1575년에 쓴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이 있고, 짜임이 방정하고 점획이 살찐 예로는 안강 옥산서원의 ‘구인당(求仁堂)’ 편액 등이 있다.

한호의 서풍은 왕실을 비롯하여 문인·사자관이나 지방의 한사(寒士)·학동(學童)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석봉천자문』·『초천자』 등은 조선말기까지 수차례 간행되면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왕실에서는 선조 이후의 어필과 종실의 서풍에 영향을 주었고, 문인 계층에서는 그와 교유했던 친우나 그 후손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사자관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특히 후대의 사자관 서풍에 큰 영향을 보였다.

한체에 대한 평가는 그가 생존했을 때나 사망한 뒤 얼마 안 되는 시기에는 대개 극찬 일변도이거나 비유적 표현이 대부분이다. 이와 달리 18세기 이후의 평가들은 보다 실제적인 시각에서 성과와 한계를 지적한 예도 많다. 예를 들어 한호가 진대의 고법을 꾸준하게 학습하여 웅수(雄秀)·기장(奇壯)한 기력(氣力)을 갖고 경건(勁健)한 필세를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사정식(書寫程式)에 빠지거나 자양(字樣)에 치중하여 비속한 필치가 나타나며, 이 때문에 청고(淸高)한 운치가 적고, 또 후대인이 비후(肥厚)·풍윤(豊潤)한 특성을 따르면서 골법(骨法)을 잃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 가운데 한호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한 예도 있지만 어떤 것은 직업 서예가라는 시각에서 글씨 수준이나 운치를 낮추어 본 예도 있다.

참고문헌

  • 이완우, 「石峯 韓濩의 草書」, 『서예학』 창간호, 한국서예학회, 2000.
  • 이완우, 「동아시아의 미술가: 석봉 한호」, 『미술사논단』, 한국미술연구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