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려청(漢旅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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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유민 가운데 군관으로 임명되어 황단(皇壇)을 지키던 자들이 속해 있던 관청.

개설

중국 명나라 유민을 ‘한인아병(漢人牙兵)’이라 불렀다. 청나라가 명을 멸하고 건국하자 그들의 대우가 달라졌다. 조선의 군관들 사이에서도 이들을 업신여기고 멸시하였다. 한인아병들은 훈련 시에도 왜군 초병의 역할을 하는 등 천대를 당했고 심한 노역에 시달렸다. 그들이 정착한 것은 효종 때부터 100년이 넘었고 명나라를 기리며 황단이 조성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대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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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한인들의 이런 사정을 가엾이 여겨 그들을 직접 접견하였고 1790년(정조 14) 황단 망배례를 행하는 시점에 그들에 대한 처우 또한 개선되도록 보살폈다. 이로 인해 한인아병은 해체되었고 금려(禁旅), 의려(義旅)와 같은 군사 체제를 따라 한려(漢旅)라 하였다. 관청의 제도와 절목도 제대로 갖추어 ‘한려청(漢旅廳)’을 꾸려 주었다(『정조실록』 14년 3월 19일).

위치 및 용도

한려청은 황단 제향 때 신탑(神榻) 받드는 일과 제사상 차리는 일은 물론 황단 곁에서 입직하는 수직관들 즉, 한려들의 관청이었다. 대보단[황단]의 동남쪽, 창덕궁 서북쪽 궁장(宮墻)인 명례문(明禮門) 밖에 있었다. 북쪽에는 ‘만세송은’이 자리해 있었고 명례문, 즉 숭지문(崇智門)과 조종문(朝宗門) 가까이에 한려청을 세워 황단을 수직하도록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일제 시기 황단이 훼손될 때 함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44년(인조 22)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조선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한인(漢人) 8명이 대군의 환행 길을 호위하였는데, 그들이 조선에 정착하여 후손을 퍼트렸다. 이때 심양과 요동 등지에서 귀화해 온 한인들이 매우 많았다. 처음에 봉림대군이 자신의 집, 즉 의동(義洞) 본궁 곁에 그들을 기거하도록 하였다가 즉위 후에는 내수사(內需司)를 통해 식량을 대 주었다. 후에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소속시키고 노역하도록 하였는데, 그물로 고기 잡는 일을 잘하는 자가 있어 어업에 종사시켰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청성잡기(靑城雜記)』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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