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익진(鶴翼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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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날개처럼 주 병력을 전방에서 적과 대치하게 한 뒤 좌우 양쪽에서 앞서 나아가 적을 부채꼴처럼 에워싸며 공격하는 군대의 공격 전술.

개설

학익진(鶴翼陣)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대규모 군사 병력을 활용하는 전술로 자주 활용하던 공격 전술이다. 서양에서는 그리스와 로마, 아시아에서는 페르시아와 초원의 유목민족, 고구려와 여진 등의 만주족과 몽골 등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한 지역에서는 늘 나타나던 전술이다. 조선시대에도 건국 초부터 학익진이 진법으로 자리 잡으면서 군사훈련부터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문종실록』 1년 6월 19일) (『성종실록』 22년 2월 6일). 연산군은 학익진을 이용하여 사냥을 일삼기까지 할 정도로 군사를 동원하는 데 탁월한 방법이었다(『연산군일기』 4년 8월 21일).

학익진이 조선시대에 대외 전쟁에서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임진왜란 때 해전(海戰)에서 학익진을 본격적으로 공격 전술에 활용하였다. 학익진은 넓은 공간에서 병력을 부채꼴 모양으로 펼친 채 적을 공격하는 대진(大陣)이다. 한반도의 지형상 육지에서 육군이 대병력을 대치하며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삼국시대부터 대규모 기병(騎兵)이 공격 전술을 펼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기병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초원이나 평지가 드문 것은 물론 기병을 지지할 병참의 설치도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말을 사육할 때 건초보다 콩을 많이 먹인 것에서도 초원이 부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전차나 수레를 이용하는 중국 황하 유역에서 벌어지던 전투 양상은 전혀 나타나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학익진을 펼칠 수 있었던 곳은 바다뿐이었다.

바다에서 학익진을 자유롭게 활용한 인물은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한산도대첩에서 일시에 군사력을 집중시켜 왜군을 격멸하는 방법으로 학익진을 사용하였다. 학익진은 소수의 병력으로는 적을 에워싸서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므로 대규모 병력을 이용할 수 있는 경우에만 활용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학익진을 왜군에게 구사한 것을 설명하였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적이 아군과 정면에서 대결할 수 있는 장소로 유인되어 와야만 학익진을 구사할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 때 거제도 인근의 대양에서 이순신이 설행한 학익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순신은 본진의 판옥선 5~6척으로 왜적을 선제공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왜적은 아군의 세력이 약세라고 오인하여 적선들이 일시에 쫓아와서 공격하였다. 이때 판옥선들은 이들에게 쫓기는 체하면서 이순신의 본진이 위치한 대양으로 이들을 유인했다. 대양에서 대기 중이던 본진에서는 왜적이 시야에 들어오자 일자 형태의 진에서 학익진으로 군진(軍陣)을 변형한 뒤 화포를 발사하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학익진의 좌우에 위치하던 군선들이 적을 에워싸면 아군의 전선 전체가 적에게 달려들면서 화포를 발사하였다. 이로 인해 적은 퇴로를 차단당한 채 아군의 화포에 집중 포화를 맞아 순식간에 전멸했다. 학익진으로 포위된 적이 조직적으로 후퇴하거나 반격을 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선조실록』 25년 6월 21일). 이처럼 학익진은 동일한 진형 내지는 대형군진을 유지한 군 병력을 활용할 때 가장 효율적인 전술이다.

물론 이 전술은 육지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 신립의 기병진이 여진을 상대할 때는 신기전(神機箭)이나 총통(銃筒)을 동시에 활용하여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신립의 군대가 왜군에게 충주에서 궤멸되었듯이 보병의 조총 사격에 무방비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실행이 어렵다. 이른바 화기가 없는 활과 창 등의 냉병기(冷兵器)만을 사용할 경우의 육지 전투에서는 학익진을 사용할 수 있지만 화기나 일정 공간을 집중해서 일제 사격이 가능한 조총이 있는 경우에는 파멸적 상황이 벌어지는 전술이다. 더욱이 냉병기를 사용하는 경우라도 기습전이 아니면 전투에 익숙한 적에게 패할 수 있었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초기에 죽산 전투에서 학익진을 펼치고 왜군의 선봉을 치려다 아군이 궤멸당한 것이 그 사례이다. 충청도 병력을 소모한 뒤 훈련도 되지 않은 병력을 학익진으로 펼쳐서 왜적의 선봉에 다가갔다가 패배한 것이다(『선조수정실록』 26년 2월 1일). 학익진을 이용하여 육지에서 승리한 경우도 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에 울산성 인근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학익진을 사용하여 왜병 400급을 베는 전공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도 울산성 인근에 이르러 왜군을 유인하여 기습한 공격이었다. 만일 왜군이 화기를 집중 사격할 준비가 되었다면 불가능한 전공이었다(『선조실록』 31년 1월 1일).

변천

조선후기에도 왕이 지휘하는 군사훈련에서 학익진을 지속적으로 연습하였다. 금군과 군영군을 동원하는 대규모 훈련이었다(『정조실록』 5년 4월 9일). 그러나 순조 이후 상번군의 정지 및 개항 이후 서구 제국주의의 신무기 체제하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기효신서(紀效新書)』
  • 『난중일기(亂中日記)』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박재광, 『화염조선』, 글항아리, 2009.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13, 경인문화사, 2012.
  • 허선도,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일조각,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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