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현(河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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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하양현(河陽縣)은 고려초기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995년(고려 성종 14)부터 하주자사(河州刺史)로 불리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하양현으로 개명되어 경주(慶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이후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나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하양현으로 유지되었으며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하양현은 임진왜란의 여파로 1601년(선조 34)에 폐지되고 대구(大邱)에 병합되었으나, 1607년(선조 40)에 복구되었다. 1715년(숙종 41)에는 읍치와 관아를 남쪽 5리 지점으로 이전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하양군이 되었으나, 1914년에 경산군에 합병되었다. 조선시대에 하양현은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하양현은 995년에 하주자사가 되었다. 정확히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초기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1018년에 하양현으로 개칭되고 경주에 소속되었다. 이후 감무가 파견되었으나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다. 조선 건국 후에도 하양현은 그대로 이어졌으며, 1413년(태종 13)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하양현은 고려시대에 하주자사로 잠시 편성되었으나 1018년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따라서 하양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하양현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하양현에는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1413년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하양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6품의 음관(蔭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15명, 지인(知印) 9명, 사령(使令) 8명, 관노(官奴) 7명, 관비(官婢) 6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하양현의 읍치와 관아는 원래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한사리 지역에 위치하였으나, 1715년에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변천

하양현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어, 전란이 끝난 직후인 1601년(선조 34)에 폐지되어 대구에 합병되었으나, 1607년(선조 40)에 복구되었다. 이후 1715년에 읍치와 관아를 남쪽 5리 지점의 천천면(泉川面)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하양현은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하양군이 되어 대구부(大邱府)의 관할에 속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하양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하양군은 경산군에 병합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