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란(荷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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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네덜란드를 지칭하던 용어.

개설

15세기 말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 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인들의 동방 진출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동쪽으로 진출한 이들은 포르투갈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6세기 초엽에 말레이반도의 말라카를 점령하였고, 중엽엔 중국 마카오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에 뒤이어 16세기 후반에 스페인 사람들이, 그리고 17세기 들어서면서 하란 즉 네덜란드 사람들이 신항로를 따라 동양으로 진출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양 진출은 동인도회사가 주도하였는데, 동인도회사는 몇 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무역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함으로써 조선시대에 하란과 조선 사이에 공식적인 교류는 없었다.

내용 및 특징

16세기 유럽의 동방 진출을 주도한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하지만 17세기로 접어들면서 이들을 제치고 하란, 즉 네덜란드와 영국이 선두에 나섰다. 원래 하란은 스페인의 영토였으나 종교개혁의 결과 개신교도들이 연합하여 1581년에 스페인에서 독립한 국가이다.

개신교 공화국으로 출발한 하란은 동방 진출에서 기독교 포교나 식민지 획득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고 상업 활동에 주력하였다. 왕실이나 정부가 아니라 상인들이 공동 출자하여 동방무역을 위한 항해를 조직하여 그때그때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시작하였으나 후에는 각자 고정적인 출자금을 내어 상설 무역기구를 조직하여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근대 주식회사의 효시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란 상인들은 해외 진출에서 당시 복잡한 유럽의 종교분쟁이나 왕실이나 국가 간의 경쟁에 휩쓸려들지 않고 오로지 상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또 하란은 이베리아반도와는 달리 좋은 선재(船材)가 많이 생산되는 발트해 연안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대양 항해를 위한 조선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유리한 조건 하에 전개된 하란의 동방 진출은 1602년에 창설된 동인도회사가 주도하였다.

하란의 동인도회사는 해외 식민지 획득은 원칙적으로 원하지 않았으나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광대한 지역의 원주민들을 통제하고 유럽인 경쟁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전략적 요지에 기지를 건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먼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식민지를 건설한 다음 1619년에는 바타비야(Batavia)를 동방 경영 본거지로 삼았다. 이 결과 본국을 떠난 하란 상선들은 희망봉 기지에서 보급을 받은 후 남인도양을 동으로 횡단하여 바타비야로 직행하는 신항로를 개척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압도하고 광대한 인도네시아 열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15세기 말의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포르투갈·네덜란드 등 서양인들이 동남아·일본 등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에 관한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는데, 조선에서는 이들을 남만 또는 길리시단(吉利施端)으로 불렀다. 길리시단은 기독교도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체모가 붉어서 홍모(紅毛)·홍모국(紅毛國)·남만홍모적(南蠻紅毛賊) 등으로도 불리었다. 조선은 이들 길리시단을 이적시하여 교류를 금지하였으므로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하란에 대한 정보는 중국 사신을 통한 간접적인 정보뿐이었다(『정조실록』 19년 윤2월 22일).

하란의 동인도회사는 1609년에 일본 히라토[平戶]에 상관을 설치하고 업무를 개시하였는데 초대 상관장은 스펙스(Jacqes specs)였다. 스펙스는 조선에서 주석의 수요가 많고 또 구입량도 많다는 정보에 따라 동인도회사 본부에 조선과의 무역을 건의하였다. 이에 동인도회사는 1622년에 레이엘슨(Cornelis Reijersen) 선장에게 중국 지역과 조선 지역에서 탐험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하란 선단이 출항하였지만 조선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또 태풍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에도 1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동인도회사는 중국 지역과 조선 지역을 탐험하고 조선과 무역하고자 몇 차례 더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변천

1666년 하멜 일행의 일부가 조선을 탈출하여 1668년에 귀국한 후 동인도회사의 17명 위원회에 『하멜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166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고 이어서 불어·독어·영어로 번역되면서 전 유럽에 조선을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하멜보고서』에는 일행의 난파 경위뿐만이 아니라 조선과의 교역에 관한 내용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었다. 이에 동인도회사는 다시 조선과의 무역을 계획하여 코레아(Corea)호를 건조하였다. 코레아호는 1669년 5월 20일에 하란의 웰링헨을 출항해 케이프 로페즈를 거친 후, 1669년 12월 10에 희망봉에 도착하였고, 이어서 1670년 4월 2일에는 바타비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코레아호는 결국 조선으로 출항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조선의 열악한 경제 상황 및 하란과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조선과의 무역을 포기하고 일본과의 무역에 집중하는 것이 좀 더 유익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같은 판단이 동인도 회사에 보고되었고, 이 보고를 근거로 동인도 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포기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과 하란 사이에 공식적인 무역 또는 교류는 성립되지 않았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하란은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수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근대적 외교 관계를 시도하였지만 당시 조선의 쇄국정책 때문에 성사되지 않다가 1961년에 대한민국과 단독 수교를 맺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하멜표류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7, 탐구당, 2000.
  • 신동규, 「17세기 네덜란드의 조선무역기도에 관한 고찰」, 『사학연구』 55-56, 한국사학회, 1998.
  • 신동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조선무역 시도와 조・일 근대화 문제」,『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회의 자료집』,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2003.
  • 신동규, 「하멜을 통해 본 조선·네덜란드·일본의 국제관계」, 『항해와 표류의 역사』, 국립제주박물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