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도치(必闍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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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에 왕의 호위와 잡무를 담당하던 관원인 겁설관 중 하나.

개설

필도치[必闍赤]는 서기(書記), 혹은 문사(文士)를 뜻하는 몽골어 비체치(bičigeči) 혹은 비첵치(bičigči)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필자적(必者赤), 필차제(筆且齊) 등으로 표기한다.

고려에서는 1225년에 최우(崔瑀)가 정방을 설치하고 문사를 뽑아 들여 임원(任員)을 삼아 관리의 인사를 처리하게 하였는데 이를 필자적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바로 필도치와 같은 말이다. 만약 『고려사』의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려에서는 몽골 간섭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몽골어가 차용된 셈이 된다. 비체치라는 단어는 그 훨씬 이전에 북방 유목 민족 사이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1220년대에 몽골에서 직접 차용되었을 수도 있지만 몽골 간섭기 이전에 거란이나 여진을 통해 고려에 알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담당 직무

필도치는 서기, 혹은 문사를 뜻하는 몽골어 비체치 혹은 비첵치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몽골에서 대칸의 연대기를 기록하거나 사무를 맡는 관리를 비체치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에서도 필도치는 문사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변천

고려의 정방은 무신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왕이나 재상 등의 측근 세력을 등용시키는 중요한 인사 기구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계속 존재하였다. 정방에 속했던 필자적과 몽골의 영향을 받은 필도치는 나중에 일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278년 이후의 필도치는 왕권 강화를 위해 측근 세력들로 구성된 기구로서 내재추(內宰樞)의 기능을 대신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방은 충목왕대 이후 1357년에 폐지되었으나 1361년에 부활한 것으로 보이며 1388년에 상서사(尙瑞司)로 고치면서 혁파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필도치가 확인되는데, 고려말부터 조선초기의 문신이었던 공부(孔俯)의 졸기 가운데,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필도치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16년 10월 7일) 이외에 필도치와 관련한 기록은 따로 없어, 조선시대에는 폐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몽골과학아카데미 어문학연구소 편, 『몽골어 대사전』, 2008
  • 白鳥庫吉, 「高麗史に見えたる蒙古語の解釋」, 『東洋學報』 18-2, 1929
  • Paul Pelliot, “Les mots mongols dans le Korye sa”, Journal Asiatique, 217-2,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