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수길(豐臣秀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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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정치가로 일본을 통일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으킨 인물.

개설

15세기 후반 이래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기 위해 힘썼던 직전신장(織田信長)이 1582년(선조 15) 피살된 후 그 뒤를 계승하여 통일 작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덕천가강(德川家康)과 손을 잡고 1590년(선조 23)까지 통일 작업을 완수했다. 일본 내 불만 세력 제거와 영토 확장을 위해 1592년(선조 25) 조선을 침략하였으나, 1598년(선조 31) 병으로 사망하면서 7년간의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덕천가강이 정권을 잡아 강호(江戶)막부를 열었다.

가계

『태합소생기(太閤素生記)』에 의하면 풍신수길은 미장국(尾張國) 애지군(愛知郡) 중촌[中村: 현 명고옥시(名古屋市)]의 목하미우위문(木下弥右衛門)의 아들이라고 한다. 미우위문은 직전신수(織田信秀)의 하급 무사였으나 부상을 입어 촌(村)으로 돌아와 백성(百姓)이 되었다. 수길의 어머니 나카(なか)는 미우위문과의 사이에서 도모(とも)와 수길을 낳았고, 미우위문이 사망한 후 직전(織田) 집안의 가신이었던 죽아미(竹阿弥)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활동 사항

수길이 7세 때 아버지 미우위문이 병사하고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 아래에서 지내다가 무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와 지금의 정강현(靜岡縣)인 원강국(遠江國)으로 가서 대명(大名)의 한 가신(家臣)의 시종이 되었다. 이어서 1554년 18세 때 미장(尾張) 청주(淸洲)의 성주(城主)였던 직전신장에게 고용되어 허드렛일을 하는 이가 되었다. 수길이 직전신장에게 고용되기 전에 그의 행차 앞에 옷을 벗고 드러누워 있었는데 부하들이 죽이려는 것을 직전신장이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으니, 도저히 제가 가난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직전신장이 그에게 변소지기 일을 시켰더니, 그가 청소한 변소에서 냄새는커녕 티 하나조차 없었고, 직전신장이 자신의 신발을 만들도록 시켰더니 정성을 다해 신발을 만들어 바쳤다고 한다. 하루는 직전신장이 금 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는데, 수길이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해서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 부어, 우물이 뒤집히면서 물 위에 떠오른 금 술잔을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고 이로써 직전신장의 총애를 받아 출셋길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선조실록』 25년 4월 13일).

1566년 미농(美濃)과 미장의 국경에 위치한 흑오[黑俣: 현 기부현(岐阜縣) 대원시(大垣市)]에 축성하여 미농 공략의 거점을 확보한 공으로 부장(部將)으로 발탁되었다. 1568년 직전신장이 실정막부(室町幕府) 장군 족리의소(足利義昭)를 옹립하여 경도(京都)를 평정하자 경도에서 정무를 보았다. 1570년부터 시작된 월전(越前)의 조창씨(朝倉氏)와 근강(近江)의 천정씨(淺井氏)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1573년 천정씨의 성 등을 하사받아 대명이 되었고, 그해 7월에 우시(羽柴)라는 성을 하사받아 이름이 우시수길이 되었다. 1577년부터 직전신장의 명령으로 산음(山陰)·산양(山陽) 지역을 정벌했는데, 그 과정에서 비중국(備中國)을 침략했다. 그는 파마국(播磨國)의 희로성(姬路城)에 진을 치고 고공(高松)의 대명인 모리휘원(毛利輝元)을 공격하였다. 1582년(선조 15) 직전신장이 가신이었던 명지광수(明智光秀)로부터 기습을 받아 경도 본능사(本能寺)에서 자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풍신수길은 곧바로 모리와 휴전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산기(山崎) 전투에서 명지광수를 처단함으로써 직전신장의 원수를 갚았다.

직전신장이 사망한 후 그의 중신들은 후계자 문제 및 영지 분할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청주성(淸洲城)에서 회의를 했다. 이 회의에서 수길은 직전신장의 손자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직전신장의 가장 유력한 가신이었던 시전승가(柴田勝家)는 3남을 천거하였다. 결국 수길이 천거한 적손 직선수신(織田秀信)으로 결정되고, 그 후견인으로 3남인 직전신효(織田信孝)를 내세운 수길의 타협안을 시전승가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고, 1583년 천악([賤ヶ岳], [시즈카다케]) 전투에서 대패한 시전승가는 결국 자결하였다. 수길은 미농 지역을 공략하여 직전신장의 3남을 자결로 몰아 상대 진영을 멸하고 직전신장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어 그는 200년 이상이나 끌어온 내전 상태를 종식시켜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직전신장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정벌에 나섰다. 1584년(선조 17)에는 직전신장의 둘째 아들을 옹립하고자 했던 강성한 대명 덕천가강과 전투를 벌였으며 승부가 분명하게 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은 동맹관계를 맺었다.

1585년 관백(關白)에 임명된 이래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천황(天皇)으로부터 풍신(豊臣)이라는 성을 하사받아 풍신수길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약 200만 석에 달하는 직할령과 주요 금·은 광산, 각지의 도시와 호상, 도로를 장악하여 경제적 지배를 강화하는 한편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전국의 모든 토지를 4등급으로 분류, 각각의 토지에 기준 생산량을 곱하여 쌀의 생산고인 석고(石高)를 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대명에게 영지를 주고 군역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토지대장에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의 이름과 경작 면적을 등재하였다. 이것은 한 토지에 여러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던 것을 부정하고 일지일작인제(一地一作人制)를 확립한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농민은 자신의 경작지 보유권을 법으로 인정받고, 세금 부담자가 되었다. 1588년에는 농민의 저항을 봉쇄하고자 농민이 보유하고 있던 도검 등의 무기를 몰수하였다. 1591년에는 무가에 고용된 무가 봉공인이 농민이나 상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직업을 바탕으로 한 신분 사회의 기초를 창출하고, 원칙상 농촌에는 농민이, 도시에는 무사와 상공인이 거주하는 병농 분리를 완성하였다.

한편 1592년(선조 25) 풍신수길의 주도하에 일본이 명의 정복과 조선의 복속을 목표로 16만의 군을 한반도 남부에 파병하여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파죽지세로 한성, 평양을 점령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명의 원군, 그리고 이순신의 조선 수군으로 인해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1593년(선조 26) 명과의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1596년(선조 29) 9월, 계속되어 왔던 명과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었고(『선조실록』 29년 11월 6일) (『선조실록』 29년 12월 21일), 1597년(선조 30) 7월, 14만의 군으로 조선을 재침략하였다. 칠천량 해전을 시작으로 2개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석권하고, 경기도로 나간 후, 조선 남해안에 왜성을 축조하여 장기 점령을 꾀하였다. 그러나 울산성 전투에서 고전한 후, 일본군 사이에서는 전선을 축소하려는 무단파와 문치파 간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598년(선조 31) 8월 풍신수길은 62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끝이 났다. 조선에서는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첩보가 전해졌는데, 이 이야기가 중국 사람들의 보고에도 나왔으며 이를 명군 지휘부가 듣기까지 하였다 하여 미리 퍼뜨린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선조실록』 31년 3월 27일).

묘소

경도부(京都府) 경도시(京都市) 동산구(東山區) 풍국신사(豊國神社)

광도현(廣島縣) 광도시(廣島市) 동구(東區) 부동원(不動院)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