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학(風水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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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형세를 관찰하여 각종 입지의 길흉을 판단하는 전통 지리학.

개설

풍수학은 지형·지세를 통하여 각종 입지의 적합 여부를 판단하는 학문이었다. 고려의 지형·지세 연구와 관심은 조선으로 이어져 풍수학은 조선건국 초부터 주요 지리 이론이었다. 크게는 수도의 입지부터 작게는 태실 선정에 이르기까지 입지 이론의 중심에 있었다. 또 중국 풍수 문헌을 중심으로 풍수학이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청오경(靑烏經)』·『금낭경(錦囊經)』·『동림조담(洞林照膽)』·『호순신(胡舜申)』·『명산론(明山論)』·『감룡경(撼龍經)』·『의룡경(疑龍經)』·『착맥부(捉脈賦)』·『지리문정(地理門庭)』 등은 음양과 과시서, 취재 지리서이자 조정의 빈번한 풍수 논쟁에서 근거로 인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풍수학은 조선건국 초부터 주요 지리 이론이었음이 『태조실록』에서 확인되었다. 1393년(태조 2)에 권중화가 한양의 종묘·사직·궁전·조시(朝市)의 형세도(形勢圖)를 올리자, 태조는 서운관과 풍수학인 이양달·배상충에게 지면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고, 김사행에게는 먹줄로 땅을 측량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 2년 2월 10일). 한양은 고려 숙종이 직접 지형·지세를 관찰하였던 장소였다. 하륜은 『호순신』을 근거로 계룡산 도읍 불가론을 상소하였고, 태조는 권중화와 정도전 등에게 이 책을 참고로 고려 산릉(山陵)들의 길흉을 재조사하게 하였다. 또 『제산릉형지안(諸山陵形止案)』에 산수의 형상을 비춰보니, 길흉이 맞았으므로 계룡산 신도 건설은 중단되고 하륜에게는 고려서운관(書雲觀)의 비록문서(秘錄文書)를 읽고 입지를 새로 물색하는 임무가 주어졌다(『태조실록』 2년 12월 11일).

태조대 풍수학인은 정식 관원이 아니었지만, 세종대부터 풍수학관을 두었다. 풍수학관은 수릉의 입지 선정에 관여하였고(『세종실록』 20년 10월 1일), 태실의 돌난간 만드는 일도 감독하였다(『세종실록』 25년 12월 11일). 또 장사 지내는 날[葬日] 선정에도 관여하였고(『세종실록』 28년 3월 30일), 태실 돌난간의 수습과 같은 일도 맡아 보았다(『세조실록』 9년 3월 4일).

풍수학은 경복궁의 입지, 헌릉 단맥, 세종의 수릉, 서운관 남쪽 길 폐쇄 여부, 풍수 문헌의 내용 진위 여부 등과 채석산, 제단, 각 능묘의 위치, 장례 날짜, 비보 풍수지리 등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심지어 태를 묻는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세종실록』 18년 8월 8일). 풍수학은 왕과 사대부, 양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연구되었다. 또 풍수학관은 왕 및 대소 신료들과 함께 현장 답사에 참여하여 지형·지세를 살폈고, 풍수문헌의 내용을 함께 논의하였다. 풍수학 관료는 출신 성분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잡과를 통하여 선발되었고, 근무 기간과 능력에 따라 종6품 벼슬까지 올랐다.

변천

풍수학은 조선건국부터 수도 입지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1406년에 풍수학은 음양풍수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학(儒學)·무학(武學)·이학(吏學)·역학(譯學)·의학(醫學)·자학(字學)·율학(律學)·산학(算學)·악학(樂學)과 함께 십학(十學)의 하나로 설치되고, 제조관(提調官)을 두었다. 세종대 안숭선의 건의에 따라 경학에 밝은 신하가 지리학 강습과 관리를 맡았다(『세종실록』 15년 7월 7일). 서운관에서 풍수학의 습독은 10명을 정원으로 하였다(『세종실록』 7년 8월 30일). 또 체아직(遞兒職) 1명을 두었고, 천문과 금루·풍수지리에서의 경험이 많고 우수한 1명만 종6품으로 승진되었다(『세종실록』 7년 11월 29일).

세종대 고중안은 유학자들의 풍수학 연구와 『지리대전(地理大全)』·『지리전서(地理全書)』·『지리신서(地理新書)』·『영경(靈經)』·『천일경(天一經)』·『지주림(地珠林』 등의 풍수문헌 간행을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세종실록』 13년 1월 12일). 또 음양학에 포함되었던 지리를 다시 풍수학이라 하였다(『세종실록』 20년 10월 22일). 풍수학의 지리서를 익힐 자는 20세 이하로 제한하여 선발하였다(『세종실록』 24년 9월 14일). 세종대부터 세조대까지 풍수학관을 두었고, 풍수학 관료는 조선시대 내내 음양과 과시와 취재를 통하여 선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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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대전(續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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