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泡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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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장인.

개설

포장(泡匠)은 왕실에서 사용할 두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포서(司圃署)나 훈련원(訓鍊院) 소속의 장인이다. 두부는 콩을 맷돌로 갈고 여기에 간수를 넣어 만들며 제사 때 사용하던 음식이었다. 맷돌은 군기시에 소속된 10명의 마조장(磨造匠)이 만드는데, 이것으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었다. 조선전기에는 죽은 사람을 위해 재를 지내는 추천(追薦) 의식 때 올리는 재물 중 두부탕 아홉 그릇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릉을 비롯한 능침의 제향용 두부는 조포사(造泡寺)에서 제작 공급하였다. 한말까지 총 51곳의 조포사가 운영되었다. 한편 조선중기 사대부들은 연포회(軟泡會)라는 친목 모임을 조직하여 밤에 사찰에 가서 두부를 끓여 먹으면서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셨다.

담당 직무

포장의 직무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궁궐에서 일상식으로 왕의 수라에 올릴 두부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 왕실의 상장례 의식용 두부를 만드는 것이다. 왕이나 왕비의 국상 때 궁궐 내에 설치되는 빈전의 제향에 사용할 두부를 만드는 일을 하였다. 셋째, 왕릉이나 묘전 등 능침의 제향에 사용하는 두부를 조포사에서 생산하였다. 조선후기부터 한말까지 왕릉 총 38개 및 진전과 관련된 사찰 총 51곳에 조포사가 설치 운영되었다.

변천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궁궐의 빈전이나 능침의 제향 때 제수로 두부를 공급하기 위해 두부를 만드는 장인 4명을 사포서에 두었다. 포장은 두부를 만들기 위해 대궐 안에서는 신부(信符)를 차고 다녔다(『세종실록』 5년 2월 10일). 그들이 빈전에 들일 두부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성종 때부터 보인다. 예종이 승하하고 그의 빈전인 영창전(永昌殿)에 제수를 만든 포장 2명을 시상한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1년 12월 19일). 당시 귀동(貴同)은 사포서의 종이었고, 상좌(上佐)는 훈련원의 종이었다. 상좌는 2년 후인 1472년에도 경안전의 빈전에 두부를 만들어 들였다(『성종실록』 3년 1월 20일). 이처럼 왕이나 왕후가 승하한 후 추천 의식 때에 제물로 두부탕 아홉 그릇을 올리게 되어 있었다(『세종실록』 2년 9월 22일). 추천 의식 때 두부를 사용하는 것은 조선전기 내내 지속되었다.

왕의 위패가 봉안된 사찰인 원찰이나 원당에서는 제수용 물품인 두부를 만드는 일을 조포사에서 수행하였다. 조포사는 조선초기부터 설치 운영되었다.

조선중기부터는 사대부 가문에서도 제사를 치르기 위해 두부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절에서 만들어 왔다. 『쇄미록(鎖尾錄)』에 의하면 사족들의 주문을 받아 사찰에서 두부를 만들어 배달해주는 식이었다. 두부를 필요로 하는 집에서 하루 전날 사찰에 콩을 보내면 그 다음 날 두부를 받아서 제사를 지내었다.

임진왜란 이후 왕실에서 불교적인 추천 기능이 사라지면서 능원에 왕이 친제를 드리거나 전궁(殿宮)에 제향할 때 두부를 준비하였다(『영조실록』 42년 8월 18일). 이에 따라 숙종대부터 제향을 드릴 때 조포사에서 두부 만드는 일이 중요해져 조포사가 조성되었다. 1790년(정조 14)에는 왕실의 능묘와 진전(眞殿)에 부속된 사찰에 조포사를 두었음이 확인된다(『정조실록』 14년 5월 17일).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에 의하면 여러 왕릉에 두부를 공급하는 조포사는 면세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실과 달리 사대부들은 사찰에서 두부를 먹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친목 모임인 연포회를 조선중기부터 조직, 운영하였다. 연포회는 밤에 사찰에 가서 두부를 끓여 먹으면서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시는 모임이었다. 연포회 중 일부는 성대한 모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1681년(숙종 7) 어사 육림일(陸林一)이 찰방 등과 어울려 연포회를 열어 탄핵을 받았다. 1733년(영조 9) 남원 괘서 사건에 연루되었던 정중제 형제와 노이겸이 남원 백복사(白福寺)에서 연포회를 연 것이 친국 과정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한말 이왕직에서 능침에 제수를 공급하는 사찰인 조포사를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경기전의 조포사인 봉서사(鳳棲寺)부터 삼척 준경·영경묘의 조포사인 천은사(天恩寺)까지 총 38개 능묘 및 진전과 관련된 사찰 51곳이 있었다. 이처럼 조포사는 왕실의 안녕과 국가 제사의 보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08년부터 1910년 사이에 향사이정(享祀釐正)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사찰들의 잡역이 중단될 때 조포사의 조포의 역도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쇄미록(鎖尾錄)』
  • 『경세유표(經世遺表)』
  • 김성진, 「『쇄미록』을 통해 본 사족의 생활문화」, 『동양한문학연구』 24, 2007.
  • 탁효정, 「『묘전궁능원묘조포사조』를 통해 본 조선후기 능침사의 실태」, 『조선시대사학보』 6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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