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자(鋪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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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지속적인 상업행위를 위하여 설치한 점포.

개설

포자는 경외의 관청에서 상업행위를 위하여 설치한 상설 점포를 가리킨다. 17세기 이후 지방에 설치되기 시작한 포자는 주로 장시의 발달과 궤를 같이했다. 초기에는 동전의 유통 방안으로 제시되기도 하였으나 이후에는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관청에서 집중적으로 개설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 장시의 발달과 함께 상업계에서 상설점포로 포자가 설치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이나 개성, 평양과 같은 대표적인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시전이 개설되었으나 지방에 상설점포인 포자가 설치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1635년(인조 13) 상평청에서는 동전의 유통을 확대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포자의 설치가 제시되었으며 개인적인 포자의 설치도 가능하도록 논의되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이와는 달리 전국적인 유통구조를 포자를 통해 형성함으로써 부족한 재원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적극 모색되었다.

내용

포자의 구체적인 모습, 규모, 취급상품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통해 내용과 운영방침을 확인할 수 있다. 포사(鋪舍)는 기와로 만들어져 있으며 빌려주는 미곡은 대동의 남은 쌀로 하든가 상평의 저축한 곡식으로 하되 사의를 헤아려서 많게 하기도 하고, 적게 하기도 하였다. 점포 내에는 관가와 팔고 사는 것은 모두 시가(市價)를 따르고 양반이나 아전의 무리들이 폐해를 끼쳐서 토색하는 것이 1문(文) 이상이면 관에 고발함을 허락하여 엄중하게 다스리고 명백히 일의 조목을 세워 판자에 새겨서 문에 걸어두도록 하였다.

변천

동전을 유통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포자의 설치가 제시된 이후 포자는 더욱 발전하였다. 효종대에 이르면 경기와 평안도,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포자를 설치하여 경외에 동전을 유통시킬 것이 건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포자의 설치가 확대되는 가운데 이로 인한 폐단이 지적되어 포자의 혁파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폐단은 바로 포자의 식리활동에 있었다. 현종대에 이르면 포자의 폐단과 혁파 여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포자의 식리활동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억지로 물건을 빌려주고 이자가 배로 늘어난 다음에 받아들이는 불법적인 행태들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양서(兩西) 지방의 경우 큰 피해를 입어 황해도의 포자가 혁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경우 포자를 통한 식리활동으로 지방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고마가(雇馬價)와 고인가(雇人價) 등을 보충해야 했으므로 쉽게 혁파하지 못하였다. 고마와 고인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할 대책을 미리 강구한 후에야 포자를 혁파할 수 있었다. 결국 조정에서 설치한 포자는 정책적 목적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운영과정에서 많은 폐단을 남긴 채 결국 폐지되었으나 이러한 포자상업의 발달은 지방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반계수록(磻溪隧錄)』
  • 김대길, 『조선후기 장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
  • 백승철, 「조선후기 관청의 상업활동과 그 구조」, 『한국사연구』106,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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