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군(平昌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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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평창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조선시대 평창 지방을 다스리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고려초기에 평창현(平昌縣)으로 개명되어 원주의 속현(屬縣)으로 존속하였다. 충렬왕 때 현령(縣令)이 파견되어 주현(主縣)으로 승격되었고, 우왕 때 평창군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현령(縣令)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평창군으로 승격되었고 이후로 강원도 평창군으로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는 욱오현(郁烏縣) 또는 우오현(于烏縣)이었다. 신라에 편입되어 욱오현으로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백오현(白烏縣)으로 고치고 내성군(奈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에 평창현이라 하고 원주의 속현이 되었다. 1299년(고려 충렬왕 25)에 비로소 현령을 두었다. 우왕 때 왕이 총애하는 환자(宦者) 이신(李信)의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고, 후에 다시 현령으로 하였다.

조선 1392년(태조 1)에 목조(穆祖)효비(孝妃)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다. 1455년(세조 1)에 군익도(軍翼道) 체제에 따라 원주도(原州道)를 설치하고 원주는 중익(中翼)으로, 영월·평창·정선은 좌익(左翼)으로 편제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군익도 즉 3익(三翼) 체제를 폐지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진관(鎭管) 체제에서 원주진(原州鎭)을 설치하여 평창·영월·횡성 등을 관장하였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에 현령과 훈도(訓導) 각 1인을 배치하였다. 현령은 종4품의 음직(蔭職)이었다. 현령의 자문기관이었던 향청(鄕廳)에는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2인을 배치하였다. 6방(六房) 관속으로 군관(軍官) 39인, 아전(衙前) 16인, 지인(知印) 12인을 두었다. 그리고 사령(使令) 12명, 관노(官奴) 24명, 관비(官婢) 28명을 두었다. 6방 관속은 객사(客舍), 아사(衙舍), 향청, 군사(郡司), 작청(作廳), 군기청(軍器廳), 훈련청(訓練廳) 등에 배속되어 수령을 보좌하면서 행정실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 평창군은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근대화를 지향하는 행정조직의 개편에서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였다. 이때 강원도는 춘천부와 강릉부로 편제되었으나 평창군은 충주부에 귀속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가 편제되었고, 이때 평창군은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원대학교 박물관, 『평창군의 역사와 유적』, 강원일보사출판국, 1987.
  • 강원도, 『강원도사』11, 강원도사 편찬위원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