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진(平薪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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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충청도 서산군에 설치한 수군 거진.

개설

평신진은 1711년(숙종 37) 충청도 수군 거진(巨鎭)으로 설치되었는데, 그보다 앞서 설치된 서산군 항금진(亢金鎭)이 전함을 정박시킬 부두를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평신진에는 ‘방선(防船) 2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의 전함이 있었고, 수군 중 실제로 복무하는 주사군 233명만 승선하였다. 평신진의 재정 수입인 수군전·결전(結錢) 등은 군병의 급료나 군기·전함의 개수(改修) 비용 등으로 사용되었다.

평신진은 황당선(荒唐船)과 이양선에 대한 보고와 감시, 무인도 조사 등을 수행하면서 충청도 서산 지역의 바다를 방어하였고, 조운선 호송과 목장 관리는 물론이고, 유사시 강화도를 지원하는 임무 등도 담당하였다.

평신진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711년(숙종 37) 서산군 대산면 항금포에 있던 항금진이 대산면평신으로 옮겨졌다. 이에 따라 첨사의 명칭도 평신첨사로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로써 평신진이 설치되었다(『숙종실록』 37년 5월 28일).

본디 항금진은 서산군 대산면 파지도진과 당진현 당진포진이 만(灣) 안쪽에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해적의 약탈을 효율적으로 막아내지 못하자 이를 대신하여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유리한 곳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전함을 정박시킬 부두를 만들 수 없는 지형이므로 다시 평신으로 진을 옮기게 된 것이다. 평신진은 유사시에 강화도 방어를 지원하였다.

평신진이 목장에 설치된 것은 목장 관리와 더불어 군병에게 목장토를 제공함으로써 수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조직 및 역할

평신진은 종3품 수군첨절제사가 최고 지휘관인 거진인데, 휘하에 제진은 없었다. 관청 건물로는 ‘외동헌 9칸 반, 내동헌 9칸, 사령청·육물고(六物庫) 각각 6칸, 작청 5량 6칸, 객사·둔고·군관청 각각 5량 5칸, 외삼문 5량 3칸, 호적고·강소대변정(江所待變亭) 각각 5칸, 군향고·군기고 각각 4량 4칸, 관노청 4칸, 행랑·마구·초고·내삼문 각각 3칸, 동문·화약고·내중문 각각 1칸, 이원창 17칸, 창택창 8칸’이 있었다.

평신진 전함은 ‘방선 2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고, 무기·깃발·악기·군량 등을 갖추었다. ‘수군 710명, 둔아병 354명, 주사군 233명, 신선군 60명’ 중 실제로 복무하는 주사군만 전함에 배치되었다. 주사군의 대장(代將), 기패관, 교사, 훈도, 좌·우포도관, 화포교사 등 장교 22명은 일방선과 이방선에 각각 11명씩 배치되었다. 이들은 모두 한량이었다. ‘기수, 사수, 포수, 쟁수·고수·요수·취수수군, 노군, 격군’ 등 군졸 211명은 ‘일방선 79명, 이방선 77명, 병선 43명, 일·이사후선 각각 5명’으로 각각 배치되었고, 신분이 기재된 경우 대부분 양인이었다.

1862년(철종 13) 평신진의 재원은 ‘수군전 1,420냥, 결전 700냥, 신선군전(新選軍錢) 120냥, 장세(場稅) 36냥, 둔세(屯稅) 943냥 8전 8푼’ 등이었는데, ‘장교 급료, 방군 급대, 무기나 전함의 수리나 개조, 지필묵 구입, 잡비’ 등으로 사용되었다.

평신진은 ‘황당선과 이양선에 대한 보고와 감시, 무인도 조사’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충청도 바다를 방어하였다. 소근진과 1년씩 교대로 충청도 태안군 안흥 포구에서부터 경기도 남양부 풍도까지 조운선을 호송하는 임무도 담당하였다. 평신진은 목장에 설치된 진이고 첨사가 감목관을 겸임함으로써, 목장 관리도 담당하였다. ‘소나무 밭 관리, 포구 선박과 신설 염전 및 어전(漁煎) 점검, 호적 작성’ 등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변천

평신진은 1794년(정조 18) 3월 관할 목장의 토지와 백성의 호적이 해당 군에서 본진으로 이속된 후, 하나의 고을처럼 운영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장용영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목장을 없애고 둔토가 설치되면서, 평신첨사가 겸임했던 감목관직과 목장 관리 업무가 폐지되었다.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혁파된 후 평신진에 설치되었던 전답 754결 10부 7속의 장용영 둔토와 유사시 수원유수부를 방어하도록 설치된 둔아병(屯牙兵)은 수원의 총리영으로 이속되었다. 평신진은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서읍지(湖西邑誌)』
  •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 『기순영사례(畿旬營事例)』
  • 『서산군산천도(瑞山郡山川圖)』
  • 『부역실총(賦役實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
  • 『충청도평신둔량안(忠淸道平薪屯量案)』
  • 『평신진주사군병신묘식초도안(平薪鎭舟師軍兵辛卯式草都案)』
  • 『호산록(湖山錄)』
  • 서태원, 「조선후기 충청도 평신둔의 설치와 경영」, 『규장각』37, 2010.
  • 서태원, 「조선후기 충청도 평신진 연구」, 『중앙사론』34, 2011.
  • 이은우, 「평신진 성황제와 여제의 변천에 관한 연구」, 『서산의 문화』21, 2009.
  • 황의천, 「조선시대 충청수영과 속진의 위치에 대한 연구」, 『보령문화』1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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