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수차(平秀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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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의 무장·대명(大名)·관백(關白).

개설

모친이 풍신수길(豊臣秀吉)의 누나로, 수차는 수길의 조카에 해당한다. 1591년 수길의 적자 학송(鶴松)이 요절한 후 수길의 양자가 되어 사실상 후계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593년 수길과 측실 정전(淀殿) 사이에 수뢰(秀賴)가 태어난 것을 계기로 수길과의 관계가 틀어졌으며, 결국 1595년 모반의 혐의를 받고 고야산(高野山)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수길의 명에 의해 할복자살하였다.

가계

부친 목하미조의 가계는 불분명하다. 수차는 사국(四國) 공략을 염두에 두고 있던 수길의 의도하에 아파국(阿波國)의 유력 무사 삼호강장(三好康長)의 양자로 보내졌다. 이에 따라 부친 목하미조 역시 삼호씨를 칭하게 되었다. 1585년 수길로부터 우시(羽柴) 성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수길의 개성(改姓)에 연동하여 이윽고 풍신(豊臣) 성을 칭하게 되었다. 1595년 수차의 할복자살 직후에 그의 일족 수십 명이 참수되었다.

활동 사항

풍신수길에게 발탁된 뒤 10대 중반부터 굵직한 전투에 참전하였다. 1584년의 소목(小牧)·장구수(長久手) 전투에서의 대패를 제외하면 패전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591년 수길의 후계자로 지목된 직후에는 내대신, 관백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였으며, 수길로부터 취락제(聚樂第)를 양도받았다. 명과 조선 역시 임진왜란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수차가 수길의 후계자임을 인지하고 있었다(『선조실록』 26년 1월 12일). 수차에 대해서는 ‘살생관백(殺生關白)’이라는 평판도 따라다니지만, 정치가로서는 나름의 수완을 발휘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예컨대 직전신장(織田信長)의 시책을 모델로 삼아 성하정(城下町)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며, 중세의 폐쇄적 동업조직인 좌(座)의 특권을 부정하고 상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령인 낙시(樂市)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관백 취임 후에는 인소령(人掃令), 즉 전국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촌락 단위로 관련 서류를 작성·제출토록 한 법령을 발포하여 일본열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사적 때문인지, 포르투갈인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는 수차를 신중하고 사려 깊은 인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수길은 1592년 5월 18일, 관백이었던 수차에게 후양성천황(後陽成天皇)을 북경으로 이동시키려는 계획 등 25개조의 각서를 보내면서 조선 점령은 물론 동아시아 정복 구상을 밝혔다.

1595년 모반의 혐의를 받았을 때는 수길을 대면하여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하였으나 문전박대를 당하였다. 고야산으로 추방된 수차는 결국 할복자살하는데, 그 수급은 경도의 삼조하원(三條河原) 강가에 효수되는 수모를 겪었다. 수차의 일족은 수차의 수급 앞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묘소

경도시(京都市) 중경구(中京區) 서천사(瑞泉寺)

참고문헌

  • 국립진주박물관 편, 오만·장원철 옮김,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부키, 2003.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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