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문(平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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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형구를 사용하거나 고문을 하지 않고 구두로 하는 심문.

내용

옥사(獄事)를 조사할 때 죄인에게 고문을 하지 않고 구두로 심문하는 평문(平問)과 자백을 받기 위해 신장(訊杖)을 때리거나 고문을 하여 조사하는 신문(訊問), 형문(刑問)이 있다. 일반적으로 죄수들은 평문하게 되면 실정을 밝히지 않거나 죄를 자백하지 않으므로 신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보통 추국(推鞫) 죄인으로서 죄상을 밝혀야 할 경우에는 형문, 신문을 하지만 남형(濫刑)이 되는 것을 경계하여 일반적인 사건 조사인 경우는 평문으로 진행되었다. 추국에서도 처음에는 평문으로 시작하되 심문자의 뜻에 흡족한 자백이나 진술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바로 형문하였다. 형문을 가하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는 문제가 있었고 평문을 하면 제대로 진술하지 않는다는 점이 계속 문제가 되었으나, 자백을 받아야 마무리가 지어지는 조선시대 재판 제도의 특성상 평문 후 형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라 하겠다.

법전에 기록된 평문해야 할 사례의 경우, 『속대전(續大典)』 ‘추단(推斷)’조에서 상민(常民)과 천민(賤民)으로서 과거, 대체로 무과(武科)에 급제한 자[常賤出身]가 중죄를 범하면 평문하되 자백을 하지 아니하면 형조에서 임금에게 품의하여 형장(刑杖)으로 추문(推問)하도록 하였다.

또 왜인(倭人)들이나 중국인들이 표류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도 형추(刑推)하지 않고 처음에는 원정(原情)의 형식으로 심문하고 평문하여 사건을 밝혀나가도록 했다. 다만 이들이 본국으로 송환되어 간다면 조선의 사정을 말하게 될 것이므로 군사를 많이 배정하고 나장(羅將)을 벌여 세우며 엄숙하게 주장(朱杖)을 진열하여 국가의 위엄을 보여 미리 입단속을 시키는 정도로 평문이 진행되었다.

용례

永安道觀察使許琮馳啓曰 道內囚浮言發說人等 以平問得情爲難 其中事狀明白者 請刑訊(『성종실록』 21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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