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결(八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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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향촌에서 결세를 징수할 때 8결의 농지를 한 단위로 해서 부(夫)를 만든 다음 각 부에 책정된 결세를 호수로 하여금 수납하게 한 제도.

개설

조선후기 대부분의 농민은 50부(負) 이하의 농지를 소유한 소농·빈농층이었다. 1결은 100부였다. 이 때문에 수령이 수십 부의 농지를 소유한 농민에게 일일이 결세를 징수하는 것보다 토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징수하는 것이 편리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결세가 현물이었으므로 농민들도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적으로 현물을 납부하기보다는 공동으로 납부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이에 정부는 여러 개의 농지를 8결(結) 단위로 묶어 부(夫)라 하고, 부마다 중간 수납자로 호수(戶首)를 뽑아 부에 책정된 결세를 수납하게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에 공물을 비롯한 요역(徭役)·군역(軍役) 등의 국가적 수취는 국가가 직접 개별 민호(民戶)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군현을 단위로 상납의 책임을 맡겼다. 다만 각 군현에서 상납해야 할 공물과 역을 군현의 민호에게 수취하는 방식은 작부(作夫)를 통한 윤회분정의 방식을 택하였다.

1471년(성종 2) 3월, 민호에 역을 부과하는 기준을 정한 역민식(役民式)에는 모든 수세전(收稅田)에서 8결마다 1명의 역부(役夫)를 징발하여 역(役)을 담당하게 한다고 규정되었다. 또한 역사의 규모가 커서 더 동원할 경우에는 6결에서 역부를 차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역민식은 『경국대전』에 이르러 “8결마다 1명의 역부를 징발하되[田八結出一夫]” 1년에 6일 이상을 역사시킬 수 없다는 규정으로 법문화되었다. 요역이 그러하였듯이 공물도 역민식으로 규정되어 8결 단위로 그 안에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운영되었다.

그 운영에 대해서는 1475년(성종 6) 7월 호조에서 아뢴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먼저, 한 읍에서 경작할 수 있는 소경전(所耕田)의 면적을 헤아려 ‘역민부(役民簿)’를 작성하였다. 역부를 차출하는 것은 반드시 이에 의거하되 제읍(諸邑)의 수세전 내에서 경작지 8결을 소유한 자는 1명의 역부를 내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8결 단위로 묶어 1명의 역부를 내도록 하였다.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공물 수취와 관련하여 ‘주비(注非)’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주비는 『만기요람』「재용편(財用篇)」에서도 확인되는데, 8결의 토지를 의미하였다. 이 단어는 ‘떼’, ‘무리’ 등의 의미를 지니는 조선 고유의 토속어로, 하나의 ‘전토의 무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팔결작부(八結作夫)의 ‘부(夫)’가 주비와 같은 의미로, 8결의 토지를 하나로 묶는 단위였다. 8결은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을 망라한 것이었다.

팔결작부는 백성의 소경전 면적에 따라 부과되었으므로 전결(田結)을 소유한 자라면 당연히 이를 부담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적 규정에 불과하였고, 그 운영의 실제는 사회적 세력의 강약에 따라 좌우되는 실정이었다. 가령 8결에서 역부를 차정할 때에는 1결을 가진 소농민이 7결을 가진 힘 있는 양반이 소유한 토지분의 요역까지 전담하는 경우가 있었다.

공물(貢物) 역시 요역 부과와 마찬가지로 8결 단위로 묶어 운영하였는데, 이러한 공물 운영 방식을 ‘팔결작공제(八結作貢制)’라고 하였다. 팔결작공제는 토지 소유의 규모에 따라 세액의 많고 적음이 있을 뿐이고, 표면상으로는 부담의 불평등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물 부과의 실상에 있어서는 군현 대소에 따른 지역적 불균형과 신분에 따른 불평등으로 그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일찍부터 공물이 소경전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균일하게 부과되었는지의 여부를 조사·보고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각 군현에 공물이 고르게 부과되려면 반드시 각 군현의 전결 규모에 비례해서 공물이 부과되어야 했다. 전결 규모야말로 각 군현이 공물을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공물을 부과할 때 각 군현 전결 규모의 상대적 차이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군현의 크기에 관계없이 큰 차이 없는 양으로 공물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작은 군현이 큰 군현에 비하여 단위 전결당 부담이 무거워지고 윤회의 횟수도 늘어났다.

국가는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작부(作夫)하는 전결 규모를 축소시켜 공물 부담을 소농에게 전가시키는 폐단을 개선하는 안을 모색하였다. 이로 인하여 세력 있는 양반[勢家兩班]이나 권세 있는 관원[豪强品官]이 대동법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변천

8결 단위의 부는 19세기에 들어 결세를 돈으로 내는 전납화(錢納化)가 이루어지면서 촌락을 단위로 결세를 징수하게 되어 그 의미가 없어졌다. 갑오개혁 때에는 개별 납세자 단위로 세금을 내는 전부자납(佃夫自納)의 원칙이 규정되었다. 1906년에는 통감부가 관세관제(管稅官制)를 시행하여 지방관의 징세권을 일체 몰수하였다. 각 지방에는 세무관(稅務官) 혹은 세무주사(稅務主事)를 두어 납세 고지서를 발부한 다음 납세자가 직접 결세를 납부하게 하였고, 이로써 8결 단위의 작부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참고문헌

  • 『經國大典』
  • 『默齋日記』
  • 『萬機要覽』
  • 박도식, 『조선 전기 공납제 연구』, 혜안, 2011.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 박도식, 「조선 전기 8결작공제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89, 1995.
  • 이성임, 「16세기 지방 군현의 공물 분정(貢物分定)과 수취: 경상도 성주(星州)를 대상으로」, 『역사와 현실』72, 2009.
  • 이영훈, 「조선 후기 팔결작부제에 대한 연구」, 『한국사연구』29, 1980.
  • 이정철, 「조선시대 공물 분정 방식의 변화와 대동의 어의(語義)」, 『한국사학보』3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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