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적국(版籍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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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이후 전국의 호구(戶口)와 토지 관련 장부를 관장하던 부서.

개설

1894년 6월 의정부 8아문 체제하에서 내무아문의 산하 부서로 판적국(版籍局)이 설치되었다. 판적국은 전국의 호수와 인구를 조사하며 출생과 사망에 관한 모든 문서와 장부를 맡아보는 부서였다. 1895년 의정부 관제가 내각 관제로 개편되면서 내무아문은 내부로 개편되었다. 내부 판적국장은 주임관 3등에 서임되었다. 1896년 9월 시행된 호구 조사 규칙에 의거하여 전국적인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매년 인구 통계를 보고받았다. 1905년 2월 내부 관제 개정으로 판적국은 지방국에 편입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 6월 군국기무처는 조선 왕조 국가의 권력 구조를 변경하여 의정부와 궁내부를 분리하였다. 또한 이전의 내무부와 육조(六曹), 기타 지나치게 많이 설치된 기구를 통폐합시키기로 하였다. 같은 해 6월 28일에는 의정부를 중심으로 중앙 행정 기구를 전격 개편하되, 8아문으로 개편하면서 내무아문이 설치되었다. 내무아문에는 총무국(總務局), 판적국, 주현국(州縣局), 위생국(衛生局), 지리국(地理局), 사사국(寺祠局), 회계국(會計局) 등 7개 부서를 두었다. 판적국은 전국의 가구 수와 인구를 조사하며 출생과 사망에 관한 모든 문서와 장부를 맡아보는 부서였다.

조직 및 역할

1895년 4월 1일 의정부 관제가 내각 관제로 개편되자, 내무아문은 내부로 개편되었다. 내부에는 주현국, 토목국(土木局), 판적국, 위생국, 회계국 등 5개의 국을 두었다. 판적국에서는 호구 문서, 지적(地籍), 조세가 없는 관유지(官有地) 처분과 관리, 관유지의 명목을 변경시키는 일 등을 맡았다. 이전 내무아문 시기 판적국에 비해 토지와 지적, 관유지 등의 관리 업무를 더 맡았다. 내부 판적국장은 주임관 3등에 서임되었다. 1899년에는 한때 주임관 4등으로 낮추어졌으나 나중에 다시 주임관 2등으로 높여 서임되었다.

내부 판적국에서는 1896년 9월 1일 반포된 호구 조사 규칙과 시행세칙인 내부령 8호에 의하여 1898년부터 본격적인 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한성 5서(五署)와 전국 각 부, 군에서는 매년 1월 내에 호적과 통표를 모아 수정하여 2월 내로 한성부와 각 도 관찰사에게 보냈다. 이후 한성부와 관찰사는 받은 자료를 정리하여 한성부는 3월 내로, 각 도 관찰사는 4월 내로 내부에 제출하였다. 내부 판적국에서는 5월 내로 호적과 통표를 편집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판적국장의 역할은 전국 각 지방에서 조사된 전국 인민 수의 수납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말까지로 되어 있는 호적과 통표의 납부 기일을 지키지 못해 관련 장부의 납부를 지체시키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판적국장은 여러 차례 감봉·견책되기도 하였다.

변천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제의 내정 간섭이 강화되면서 1905년 2월 26일 칙령 15호로 내부 관제를 다시 반포하였다. 이때 내부에는 지방국, 경무국, 회계국 등이 있었는데, 판적국의 업무는 지방국으로 소속되었다. 이어 1907년 12월 13일에는 칙령 37호로 내부 관제가 개정되어 지방국, 경무국, 토목국, 위생국의 4국으로 편제되었다. 이때 판적국의 소관 업무는 경무국에 재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관보(官報)』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1~40, 국사편찬위원회, 1986~1994.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근대법령자료집』1~4, 국회도서관, 1970~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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