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하례(巴夏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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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주일 영국공사, 주청 영국공사, 주조선 영국공사를 역임한 영국외교관.

개설

파하례는 파크스(Harry Smith Parkes)의 한자식 표기이다. 파크스는 1828년에 영국 스태퍼드셔에서 출생하였다. 1838년 킹 에드워드 문법학교(King Edwards Grammar School)에 입학하였으며, 1841년 10월에 사촌매제 귀츨라프(Karl Friedrich Gützlaff)가 있는 중국마카오로 이주하였다. 1843년 8월 홍콩에서 실시된 영사 선발시험에 합격한 파크스는 홍콩 식민청에서 수습으로 근무를 시작하였으며, 1844년 6월 하문(夏門)을 시작으로 복주(福州)·상해(上海)·광동에서 통역 및 영사 업무를 수행하였다. 1864년에는 상해 주재 영국 영사로 활동하였다.

1856년 8월 광주에서 대리영사직을 수행하던 파크스는 애로호사건 당시 영국 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860년에 북경에서 천진조약의 비준업무를 담당하다가 청국 군대에 체포되어 북경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무력으로 점령하게 된 명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865년 3월에 파크스는 올콕의 후임으로 주일 영국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866년 6월 25일에 프랑스·네덜란드·미국과 함께 개세약서(改稅約書)를 일본에 관철시켰다. 그 결과 일본은 병고(兵庫: 현 고베)의 조기 개항과 수입관세율을 5%로 인하하는 안을 수용하였다. 1868년에 일본에서 무진전쟁(戊辰戰爭)이 발발하자, 파크스는 반막부 세력인 살장(薩長)동맹군이 에도에 무혈 입성하는 데 공헌하고, 신정부에 대한 신임장을 교환함으로써 영국은 최초로 명치 정부를 승인한 국가가 되었다.

일본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에게 조약 개정을 요구하자, 파크스는 협상 대표로 교섭을 진행하였다. 조약 개정 교섭에서 일본 정부가 영사재판권 폐지와 수입관세율 인상을 요구하였는데, 파크스는 영사재판권 폐지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대신에 수입관세율 인상을 대가로 영국인의 내지통행권을 요구함으로써, 조약 개정 협상이 결렬되었다.

18년 동안 주일 공사를 역임한 파크스는 1883년 7월에 주청 영국공사로 임명되었다. 1883년 11월에 전권공사로 임명된 뒤 조선과 제2차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조선공사를 겸직하게 된 그는 1884년 4월에 서울로 가서 비준서를 교환하였다. 1885년 3월 22일에 북경에서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가계

파크스의 아버지는 ‘Parkes, Otway & Co.’라는 철공소를 운영하였다. 파크스가 4세일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마차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파크스는 1841년에 마카오에 거주하는 사촌 누이 메리 원스톨(Mary Wanstall)을 찾아가는데, 메리의 남편은 독일인 선교사이자 최초로 조선을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였다. 그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1832년 7월 22일(음력 6월 25일)에 충청도 홍주에 출현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을 비롯해서 시암, 유구를 항해한 경험을 바탕으로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the Loo-Choo Islands』(1834)라는 저서를 남겼다. 파크스의 장인 토마스 플루어(Thomas Plumer)는 잉글랜드·웨일즈 고등법원 부장판사이자 기록보관관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1875년 7월에 조선과 일본의 협상 결렬 소식을 들은 파크스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조선 개항을 주장하였다. 일본이 러시아와 연합해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판단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조선 침략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한 영국외무부는 파크스의 거문도 점령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1876년 2월에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을 때 파크스는 프랑스, 독일과 포함외교로 조선을 개항시키자고 건의하였는데, 영국외무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880년 러시아와 청의 이리 국경분쟁이 러시아의 조선 침략설로 확대되자, 주일 영국대리공사케네디는 조선의 문호개방을 외무부에 건의하였다. 영국외무부는 영국에서 휴가 중인 파크스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파크스는 청정부의 협조를 얻어서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되 전권공사로 영국의 중국함대 사령관 윌레스를 추천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와 청이 이리조약을 체결하자, 영국 외무부에서는 조선과 조약 체결을 진전시키지 않았다.

1882년에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이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을 주선하자, 영국 외무부에서는 윌레스를 전권공사로 임명해서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 결과 1882년 6월에 조선과 영국은 제1차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조약 개정을 위한 예비회담에 참석하고 있었던 파크스는 제1차 조영조약을 반대하였다. 제1차 조영조약의 내용이 일본이 영국에 요구하는 조약 개정안과 유사하며, 청국이 제1차 조영조약을 토대로 영국에 조약 개정을 요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국외무부는 파크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제1차 조영조약의 비준을 보류하였다.

파크스는 1882년 10월부터 제물포조약의 비준차 일본에 도착한 수신사 겸 전권대신 박영효,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합류한 김옥균, 민영익과 회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박영효 등은 청의 간섭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크스에게 제1차 조영조약의 비준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파크스는 제1차 조영조약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내용에 준해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1883년 3월과 5월 애스턴을 두 차례 조선에 파견해서 조청장정을 균점하기 위한 교섭을 진행시켰지만, 조선 측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자 1883년 6월 10일에 파크스는 영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이 청과 일본에 관철시킨 조약을 집약해서 정리한 조영조약 초안을 완성하였다. 이는 40여 년을 청국과 일본에서 외교관 활동을 수행하면서 조약 협상 과정에 참여하였던 경험의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파크스는 1883년 11월 조선과 조약 체결을 위한 전권공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조선 측 전권대신인 민영목과의 교섭에서 파크스는 초안의 대부분을 관철시키고 11월 26일 제2차 조영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였다(『고종실록』 20년 10월 27일). 이를 통하여 주요 수입품에 대해서 7.5%의 관세를 부과하는 협정관세와 내지통상 및 개항장간 통상의 권리를 획득하였으며, 영사재판권의 내용을 강화하였다. 조약 체결 다음 날에는 고종을 알현하였다(『고종실록』 20년 10월 28일).

파크스는 조약 체결 직후에 영국외무부에 조선공사를 본인이 겸직하고, 애스턴을 조선 주재 영국총영사로 임명할 것을 건의해서 관철시켰다. 1884년 4월 초대 조선 주재 영국 공사로서 조선에 건너가서 조약 비준서를 교환하고(『고종실록』 21년 4월 4일), 고종을 알현하고 북경으로 귀국하였다(『고종실록』 21년 4월 7일).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파크스는 영국 외무부에 거문도 순찰을 건의하였다. 뒤이어 그는 청과 일본의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해서 외교적 중재를 실시하였으며, 청과 일본이 천진협상에 돌입하는 데 기여하였다.

상훈 및 추모

1859, Companion of the Order of the Bath.

1862, Knight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ath.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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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