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목(坡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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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파주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파주목(坡州牧)은 원래 고려시대 파평현(坡平縣)과 서원현(瑞原縣)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1394년(태조 3)에 경기도가 좌·우도로 나뉘면서 파평과 서원은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1398년(태조 7)에 두 현을 합쳐 원평군(原平郡)이 되었으며, 1460년(세조 6)에 비로소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파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한성부 파주군이 되었으며, 1896년(고종 33)에 13도가 설치되면서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파주목은 고려 때에는 파평현(坡平縣)과 서원현(瑞原縣)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선이 개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398년(태조 7)에 두 고을이 합쳐져 원평군이 되었다. 1460년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목으로 승격되고 파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1504년(연산군 10) 잠시 고을이 폐지되었지만 반정(反正)으로 중종이 즉위한 해에 복구되었다.

조직 및 역할

중종 때에 발간된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파주목에는 목사(牧使)·교수(敎授) 각 1명을 두었다. 교수는 지방 향교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부와 목에 두었으나, 무록관(無祿官)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에서 자치규약인 향약 등이 활발하게 운영됨으로써 조선후기에는 모두 폐지시켰다. 영조 때 편찬되어 조선후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여지도서』를 보면, 파주목에는 목사 아래 좌수 1명, 별감 2명, 아전 32명이 있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목에는 대개 4~5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임무는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유수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고려 때 파평현과 서원현의 변화를 먼저 살펴보면, 우선 파평현은 1018년(고려 현종 9)에 장단현의 속현이 되었다가 1062년(고려 문종 16)에는 개성부에 예속되었고, 1106년(고려 예종 1)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서원현은 1018년에 양주에 소속되었고,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1387년(고려 우왕 13)에 서원현으로 개칭되고 감무 대신 현령이 파견되었다. 조선이 개창한 다음 해인 1393년(태조 2)에 고을 아전과 백성들의 청원에 의하여 군(郡)으로 승격되었으며, 1398년(태조 7)에는 파평과 서원이 합쳐져 원평군이 되었다. 1414년(태종 14)에는 교하현이 폐지되면서 이 고을에 소속되었다. 1415년(태종 15)에 1천 호가 넘었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태종실록』 15년 3월 25일). 1418년(태종 18)에 교하현을 다시 설치함에 따라 원평도호부는 1천 호 미만이 되어서 당연히 군으로 강등되어야 하나, 아전과 백성이 호소하여 그대로 두었다. 1459년(세조 5)에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내향이라 하여 목으로 승격되고 파주로 이름이 바뀌었다(『세조실록』 5년 10월 2일). 1504년(연산군 10)에 이곳을 임금이 행행(行幸)하는 장소로 삼아서 파주목은 폐지되어 이웃 고을에 분속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파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개편될 때 파주군으로 바뀌어 한성부 관할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13도가 설치되면서 경기도 관할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파주목(坡州牧)
  • 『여지도서(輿地圖書)』보유편(補遺篇) 경기도(京畿道) 파주목(坡州牧)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