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노후(巴禹路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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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외교관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인물.

개설

파우노후는 파블로프(Pavlov, Alexander)의 한자식 표기이다. 러시아 해군사관학교(Морской кадетский корпус)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가 되었다. 1886년에 러시아외무부 관리가 되었고, 1891년부터 주청 러시아공사관에서 근무하였으며, 1896~1898년에는 주청 러시아 대리공사를 역임하였다. 1899~1904년 주한 러시아 공사를 역임하였다.

가계

파블로프의 부친 이반 파블로프(Павлов, Иван Петрович)는 러시아 육군 장군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파블로프는 1899년에 마튜닌([馬丟寧], Н.Г. Мтюнин)의 후임으로 주한 러시아공사가 되어 서울에 부임하였다(『고종실록』 36년 1월 12일). 파블로프는 일본이 한국 문제에 개입하는 상황을 억제하고 고종과 집권 세력이 친러 정책을 수행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정부 내 친러 세력을 육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1899년에 마산포 개항을 발표하자, 파블로프는 마산포를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위한 항구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1900년 3월에 마산포 조차에 관한 협정서를 한국 정부와 체결하였다. 1903년 4월에 파블로프는 이용익으로부터 압록강삼림벌채권을 획득하였으며, 뒤이어 용암포 조차를 요구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용암포 조차를 허가하였지만, 일본·영국·미국의 반발로 이를 철회하고 그 지역을 개항장으로 두기로 결정하였다. 파블로프는 일본 측과 고종이 제의한 한반도 중립화론과 관련한 협상을 진행하기도 하였으며, 한국과 덴마크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에 덴마크 측 전권대사로 조약을 체결하였다(『고종실록』 39년 7월 15일).

러일전쟁으로 한국과 러시아 국교가 단절되자 파블로프는 1904년 2월 12일에 서울을 떠났다(『고종실록』 41년 2월 23일). 러일전쟁 기간 동안 파블로프는 상해로 건너가서 러시아 극동총독이 발의하여 설립한 상해 정보국의 수장이 되어서, 고종과 러시아 정부를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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