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산성(婆娑山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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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파사산성 |
한글표제 | 파사산성 |
한자표제 | 婆娑山城 |
동의어 | 파사성(婆娑城) |
관련어 | 남한강(南漢江), 남한산성(南漢山城)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삼국시대~조선 |
왕대 | 삼국시대~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장소 | 경기도 여주군 |
규모(정면/측면/칸수) | 둘레: 1,800m, 높이: 6.25m |
양식 | 산정식(山頂式) 산성 |
관련 인물 | 류성룡(柳成龍), 의엄(義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파사산성(婆娑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8년 3월 1일, 『선조실록』 28년 8월 22일, 『선조실록』 36년 10월 23일, 『선조실록』 29년 11월 26일, 『선조실록』 38년 7월 11일, 『광해군일기』 2년 1월 11일 |
경기도 여주남한강 변의 파사산에 위치한 산정식 산성.
개설
파사산성은 신라 파사왕 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파사성(婆娑城)이라고 불린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고대 파사국(婆娑國)이 위치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문헌적 근거가 없고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기록이 없어 성의 본래 형태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중인 1595년(선조 285) 비변사에서 류성룡(柳成龍)의 주도로 승려 의엄(義嚴)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산성을 수축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28년 3월 1일). 성이 완성되자 둔전을 개척하고 승군이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전쟁 이후로는 별도의 별장(別將)이 파견되지 않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광해군대 이후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아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적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 및 용도
파사산성은 여주남한강 변에 위치한 파사산에 있으며 산 아래에는 강을 건너는 이포진(梨浦津)이 위치해 있다. 이포진은 남한강이 갑자기 좁아지는 곳이며 또한 모래톱이 넓게 발달해 있어 강을 건너기에 용이한 곳이었다. 이포진 아랫마을의 이름은 수부말로 수부(水夫)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던 곳이라고 하니 이포진이 나루로서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사산은 이포진에서 강 건너편, 나루터가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런 위치적 특성으로 볼 때, 파사산성은 남한강 수계를 따라 서울로 연결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수축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산성 성벽의 일부는 강을 향해 튀어나와 있어서 한강을 상·하류와 주변까지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파사산성은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파사성이라고 불린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강역을 고려해볼 때 신라가 이 지역에 축성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고대 파사국이 위치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문헌적 근거가 없어서 이 또한 신뢰하기 어렵다. 파사산이 남한강 도강에 용이한 이포진을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해 있어 성이 남아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기록이 없어 그 변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파사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주목받게 된 것은 류성룡에 의해서이다. 류성룡은 경기지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파사성과 수원의 독성(禿城), 양성(陽城)의 무한산성(無限山城) 등을 정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견이 받아들여져 1595년(선조 28) 파사산성 수축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류성룡은 축성을 담당한 의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독려하고, 산성의 군기(軍器) 역시 확충하도록 하는 등 계속하여 관심을 가졌다.
파사산성을 수축할 때 의엄이 동원한 승군이 5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선조실록』 28년 8월 22일). 이때 수축한 성벽의 길이는 1,100보였다. 산성이 완성된 뒤로는 파사성의 군사는 영서(嶺西) 고을의 군사 중 강릉·삼척 두 진(鎭)으로 들어가는 자들을 파사산성으로 보내어 수직(守直)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6년 10월 23일). 또한 여주·이천·양주·광주의 전세(田稅)를 산성으로 들여보내게 하였으며(『선조실록』 29년 11월 26일), 둔전을 경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로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의엄이 축성을 끝내고 돌아간 뒤 여주의 관원만으로 관리했을 뿐 별장을 파견하지 않아 성의 군사적 기능은 상실되었다. 그리하여 비변사에서는 죽산산성(竹山山城)을 수축했던 승려 영주(靈珠)를 파사산성에 들여보내 주지(住持)로 삼아 승군으로 하여금 산성을 지키게 하였다(『선조실록』 38년 7월 11일). 그러나 그 이후로도 관리가 되지 않아 1610년(광해군 2)에 이르면 이미 무너진 지 오래되어 왕이 수선을 명령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1월 11일). 그러나 그 후로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영조대의 『여지도서』에는 파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이 허물어져 성첩이 반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고, 고종대의 『대동지지』에도 역시 허물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남한산성의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파사산성의 군사적 중요도는 떨어졌다. 때문에 파사산성은 더 이상 관리되지 않고 폐성이 되었던 것이다. 현재는 발굴 조사를 거쳐 정비되어 사적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형태
파사산성은 산 정상부를 둘러가며 쌓은 산정식(山頂式), 일명 테뫼식 형태이다. 성벽은 삼국시대의 것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조선시대의 것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최근 정비되었다. 성벽의 높이가 최고 6.25m, 최저 1.4m이며, 처음 쌓은 성벽과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성벽이 구별된다. 동문(東門) 터에는 옹성문(甕城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남문(南門) 터에는 문루(門樓)를 세웠던 주춧돌들이 남아 있다. 둘레는 1,800m에 달한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서애집(西厓集)』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재연구원, 『여주 파사성』, 경기문화재단,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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