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병(罷私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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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정종 2)에 종친과 훈신이 관장하던 시위패(侍衛牌)를 혁파하여 삼군부(三軍府)에 소속시킨 조치.

개설

1392년(태조 즉위)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돌발적인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왕자·종친들의 사병(私兵) 소유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개국 초부터 계속 군사 훈련을 하였는데도 제대로 진도(陣圖)를 익힌 곳은 나주진 뿐이었다. 1398년 7월에 군사 훈련을 소홀히 한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종친 등을 처벌한 태조는 얼마 후 이방번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사병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인 무인지변(戊寅之變)으로 이방원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왕자·종친이 다시 사병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정종이 즉위하고 후사가 없는 정종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이방원·이방간이 갈등을 빚는 가운데 1400년에 이방간이 난을 일으켰다. 이방원은 이방간의 군사와 교전 끝에 이방간을 체포하였다. 얼마 후 이방원은 왕세자로 책봉되었고[『정종실록』 2년 4월 6일], 2개월 후에는 그의 의중대로 사병이 혁파되었다.

역사적 배경

태조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휘하에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 정도전 등의 반대가 있었지만, 태조는 왕실의 울타리로 삼기 위해 왕자 등의 사병 소유를 허용하였다. 이방원이 무인지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비록 혁파되었지만 오랫동안 시위패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방간이 난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 휘하에 오늘날의 황해도 지역인 풍해도(豐海道)와 서북면(西北面)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정종실록』 1년 11월 1일].

발단

1400년에 이방간은 서열로 보아 자신이 정종의 후사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이방원의 대우에 불만을 품은 박포(朴苞)가 이방원이 이방간을 제거하려 한다는 말로 이방간을 동요시켰다. 이 말을 들은 이방간은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방원을 선제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우현보(禹玄寶)의 문생인 이방원은 그를 통해 이방간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군사 대응을 자제하던 이방원이 공격을 시작하면서 이방간의 군사와 교전하였다. 이방간은 체포되었고 곧 유배되었다[『정종실록』 2년 1월 28일]. 며칠 후 이방원은 왕세자로 책립되었고, 군국중사(軍國重事)를 맡게 되었다.

경과

실권(實權)을 장악한 이방원은 더 이상 왕자·종친들의 사병 소유를 허용하여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간(臺諫)이 사병 소유의 위험성과 사병을 징발하는 폐단을 논하자, 정종은 왕세자와 의논하여 사병을 혁파하였다[『정종실록』 2년 4월 6일]. 이는 이방원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때 강원도와 동북면(東北面)의 정안공(靖安公) 이방원, 경기도와 충청도의 익안공(益安公) 이방의(李芳毅), 풍해도와 서북면의 회안공(懷安公) 이방간, 경상도와 전라도의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이거이(李居易)·조영무(趙英茂),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조온(趙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천우(李天祐) 등 종친·훈신(勳臣)으로서 군사를 관장하고 있던 이들의 시위패도 삼군부로 이속되었다[『정종실록』 1년 11월 1일]. 이 조치에 불만을 품은 조영무는 황주(黃州)에 유배되었다.

사병 혁파는 조선초 권력 투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자, 조선의 군사 제도가 진일보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이방원이 즉위한 후 강력한 중앙 집권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참고문헌

  • 구현주, 「조선 태종의 왕권 강화책에 대하여」, 계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7.
  • 이희관, 「조선 초 태종의 집권과 그 정권의 성격」,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 전철기, 「여말 선초의 사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 유재리, 「고려 말 조선 초 사병(私兵) 연구」, 『한국학연구』7, 1997.
  • 이상백, 「삼봉 인물고 (1): 무인난설원기(戊寅難雪寃記)를 중심으로」, 『진단학보』2, 1935.
  • 이상백, 「삼봉 인물고(완): 무인난설원기(戊寅難雪寃記)를 중심으로」, 『진단학보』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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