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루(罷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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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5경(更) 3점(點) 말이 되면 쇠북을 33번 쳐서 도성 안의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음을 알리던 것.

개설

조선시대에는 보루각(報漏閣)에서 매일 밤 1경 3점에 종을 28번 쳐서 도성의 문을 닫고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을 인정(人定)이라 하였으며, 5경 3점에는 큰 쇠북을 33번 쳐서 도성의 문을 열고 도성 안에 시행되던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음을 알렸는데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한다. 여기서 28이란 숫자는 하늘의 28수(宿)를 상징하고, 33이란 숫자는 불교의 33천(天)을 뜻한다. 이와 같이 궁중의 보루각에서 밤에 징과 북을 쳐서 경점(更點)을 알리던 일을 좌경(坐更)이라 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에는 하루를 100각으로 나누었는데, 일몰 이후 2.5각이 되는 때는 혼각(昏刻)이라 하고 일출 전 2.5각이 되는 때를 효각(曉刻)이라고 하였다. 혼각과 효각 사이를 5등분하여 각각 1경(更), 2경, 3경, 4경, 5경이라고 하였다. 또한 각 경을 5등분하여 그 각각을 점(點)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밤 시간을 5경 5점으로 나누는 시각제도를 경점법(更點法)이라고 한다.

여기서 일몰 후 2.5각과 일출 전 2.5각을 합쳐서 혼명분(昏明分)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현대의 항해박명 시각과 비슷한 개념이다. 조선후기에 사용된 시헌력에서는 하루를 96각으로 나누었을 뿐만이 아니라 태양이 지평선 아래 –18°가 되는 때를 혼각과 효각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혼명분이 날마다 또는 절기마다 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구면삼각법과 삼각함수를 활용할 줄 알아야 계산할 수 있었는데, 1789년에 와서야 김영(金泳)이 이러한 수학을 터득하여 계산이 가능해졌다.

조선시대 야간 시각제도에서는, 도성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1경 3점 말에 종을 28번 쳐서 도성의 문을 닫고 야간 통행금지가 시작됨을 알렸는데 이것을 인정이라고 하고, 5경 3점 초에는 종을 33번 쳐서 통행금지가 해제됨을 알렸는데 이것을 파루라고 한다(『세종실록』 5년 1월 18일). 또한, 국왕이 정전(正殿)에 있을 때 정오(正午)를 알리기 위해 북을 쳤는데 이것을 오고(午鼓)라고 한다.

변천

태종 때 파루 시각을 5경 초점에서 5경 3점으로 고쳤다(『태종실록』 14년 6월 20일). 세종 때는 대칭성을 고려하여 1경 3점 말을 인정으로 정의했고, 5경 3점 말이었던 파루 시각을 5경 3점 초로 정했다(『세종실록』 5년 1월 18일).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따라 홍수나 가뭄 등의 재이(災異)가 발생하면 북은 치지 않고 종만 치게 하였고, 이러한 재이가 소멸하면 다시 원래의 제도로 복귀하여 북과 종을 함께 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7년 6월 23일)(『세종실록』 8년 4월 23일)(『세종실록』 9년 6월 23일)(『세종실록』 9년 5월 25일). 고종 때는 오고, 인정, 파루 때 금천교(禁川橋)에서 대포를 쏘게 하였다(『고종실록』 21년 윤5월 20일).

참고문헌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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