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천군(通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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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통천 지방을 통치하던 관아. 조선시대 통천군을 다스리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고려시대에 읍호는 금양군(金壤郡)이며, 현령(縣令)이 파견된 주현(主縣)으로 흡곡(歙谷)을 비롯한 속현(屬縣)을 관할하였다. 고려중기에 흡곡에 현령이 파견되면서 금양과 흡곡은 분리되었다. 조선시대에 통천군(通川郡)으로 개칭되었고, 조선후기까지 이 지방의 행정기구로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 때 휴양군(休壤郡) 또는 금뇌(金惱)로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 때 금양군(金壤郡)으로 개칭되었다. 685년(신라 신문왕 5)에 명주(溟州)의 영현이 되었고, 금양군은 습계현(習溪縣)·제상현(隄上縣)·임도현(臨道縣)·파천현(派川縣)·학포현(鶴浦縣) 등을 영현으로 두었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 10도제에서 삭방도(朔方道)에 속하였고, 현령을 두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지방제도 개편에서도 현령으로 유지되었다. 1248년(고려 고종 35)에 영현이던 흡곡현에 별도로 현령이 배치되면서 분리되었다. 5도양계 체제에서 동계(東界)에 속하였고,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통제를 받았다. 1285년(고려 충렬왕 11) 금양군의 현령을 폐지하고 읍호를 통주(通州)로 바꾸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1314년(고려 충숙왕 1)에 강릉도(江陵道)와 교주도(交州道)를 합병하여 교주도라 하였을 때 이에 속하였고, 1388년(고려 우왕 14)부터는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에 속하였다.

조선 1395년(태조 4)에 교주강릉도가 강원도로 개칭되면서 통천은 강원관찰사의 치하에 들어갔다. 1413년(태종 13)에 주변의 영현을 흡수 통합하면서 통천군으로 개칭되었고 수령으로 군수가 임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통천군의 호구는 344호 1,575명이었고, 흡곡현의 호구는 219호 675명이었다.

1455년(세조 1)에 군익도(軍翼道) 체제에 따라 고성도(高城道)를 설치하고, 고성은 중익(中翼)으로, 통천과 흡곡은 좌익(左翼)으로 편제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군익도 즉 3익(三翼) 체제를 폐지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진관(鎭管) 체제에서 간성진(杆城鎭)이 설치되어 고성·통천·흡곡 등을 관장하였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762년(영조 38) 강상(綱常)을 범하는 죄가 발생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71년(영조 47)에 복호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에 군수(郡守)와 훈도(訓導) 각 1인을 배치하였고, 군수는 음직(蔭職)으로 6품 관직이었다. 군수의 자문기구였던 향청(鄕廳)에는 좌수(座首) 1인과 별감(別監) 2인을 두었다. 6방(六房) 관속으로는 군관(軍官) 50인, 아전(衙前) 29인, 지인(知印) 15인을 두었다. 그리고 사령(使令) 20명, 관노(官奴) 9명, 관비(官婢) 8명을 두었다. 6방 관속은 객사(客舍), 아사(衙舍), 향청, 훈련청(訓練廳), 군기청(軍器廳) 등 관아에 배속되어 수령의 지휘 아래 행정실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는 강릉부와 춘천부로 나뉘었다. 아울러 군현제가 폐지되고 각 고을은 군으로 단일화되었다. 이때 통천군은 강릉부 관할이 되었다. 1896년(고종 33)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하면서 통천군은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1910년(순종 4)에 흡곡군이 통천군에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원도, 『강원도사』11, 강원도사 편찬위원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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