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진부(通津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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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의 통진부를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통진부(通津府)는 본래 고구려평회(平淮)였는데 신라 경덕왕이 분진(分津)이라 고쳐서 장제군(長堤郡)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때 통진으로 개칭되었지만 그대로 속현이었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통진감무가 설치되었다. 조선이 개창된->한 직후인 1394년(태조 3)에 경기도가 좌·우도로 나뉘면서 통진은 우도에 소속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통진부가 설치되었으며, 이후 1701년(숙종 36)에 죄인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현(縣)으로 강등되었지만 10년 후에 다시 복구되어 부(府)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인천부 통진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통진부는 고려 때인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어 통진 지방을 관할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인 1394년(태조 3)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통진감무가 설치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1694년(숙종 20)에 강화도 입구를 지키는 문수산성(文殊山城)이 중수(重修)되고 산성이 있던 통진이 부로 승격되었다(『숙종실록』 20년 9월 13일).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는 통진현으로 기록되어 있고 종6품의 현감 1명과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훈도(訓導) 1명을 두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으나, 무록관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의 향약이 활발해지면서 조선후기에 모두 폐지되었다. 조선후기에 발간된 『여지도서』에는 현에서 부로 승격된 상황이 반영되어 통진부로 기록되어 있고, 3품의 부사(府使) 1명 외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80명, 아전 25명 등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부에는 대개 4~5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임무는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유수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이며,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통진부는 고려 때 통진으로 정해졌고,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통진감무가 설치되었고, 수안현(守安縣)과 동성현(童城縣)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조선에서도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1394년(태조 3)에 통진감무가 설치되었고 수안현과 동성현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감무가 현감으로 바뀌면서 통진에도 현감이 파견되었다. 1434년(세종 16)에는 통진이 500호(戶)가 되어 교도(敎導)가 임명되었다(『세종실록』 16년 8월 4일). 1694년(숙종 20)에 강화의 갑곶진(甲串鎭)과 마주 보며 해안 방비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문수산성의 중수가 완성되자 문수산성이 있던 통진이 부로 승격되었다. 1701년(숙종 36)에 부모를 살해한 죄인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통진부를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710년(숙종 45)에 다시 통진부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통진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포군으로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통진현(通津縣)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통진(通津)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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