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성(太白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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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평산에 위치한 의주대로 수비를 위해 축조한 산성.

개설

1719년(숙종 45) 평산의 읍치 인근의 태백산에 축조한 성으로, 이전 성황산성(城隍山城)의 옛터에 다시 쌓은 것이다. 숙종 말엽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의주대로(義州大路)를 기존의 황해도에 있던 5개의 산성으로는 방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적로를 차단하기 위해 새롭게 건조하였다. 이로써 황해도는 의주대로 주변 수비에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 서흥의 대현산성(大峴山城)과 함께 3개의 산성을 갖추어 더욱 만전을 기할 수 있었다. 또한 읍성(邑城)이 없던 평산의 군민은 위급할 경우 태백산성으로 들어가 변란에 대비할 수 있었다.

위치 및 용도

조선후기 황해도 내륙에는 5개의 산성이 있었다. 조선전기부터 있던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 은율의 구월산성(九月山城), 재령의 장수산성(長壽山城), 서흥의 대현산성과 1635년(인조 13)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산성들은 대부분 해주 내륙 방어를 위한 것이어서 변란이 일어났을 때 피란하기엔 적합했으나 적로를 차단하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한편 평산은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바로 옆에 있었지만 읍성이 없었고 적로를 차단하기에 특별한 진보(鎭堡)가 없었다.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태백산성이 18세기에 새롭게 축조된 것이다.

태백산성은 평산의 읍치(邑治), 즉 수령 관아 소재지에서 약 2㎞ 떨어진 태백산에 위치하며 바로 옆에는 예성강이 흐르고 있다. 또 바로 인근에서 의주대로 중 개성에서 청석동(靑石洞) 고개를 지나 금천·평산·서흥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지나고 있었다. 만약 적들이 의주대로를 따라 개성 방향으로 남하한다면 평산의 군민들은 태백산성으로 들어가 적의 전진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이는 황주의 정방산성을 지나 개성의 대흥산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선 중에 서흥의 대현산성에서 개성의 대흥산성까지 비교적 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방어시설이 없던 약점을 보충할 수 있었다.

변천 및 현황

태백산성은 본래 성황산성의 터 위에 지은 것인데, 성황산성은 고구려 때의 성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산성의 성문은 모두 홍예문으로 고구려 때는 쓰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현재 확인되는 태백산성의 성벽 등은 조선후기에 다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평산은 의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직로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읍성이 없었고 군량은 대흥산성에 군기(軍器)는 장수산성에 두어 급박한 일에 대비하기 어려웠다. 이에 1718년(숙종 44) 우참찬(右參贊)이건명(李健命)의 건의에 따라 성황산성의 터를 개축하여 평산의 군기와 군량을 모아 두고 급박한 일에 대비하자고 하였다. 이 일은 몇 달 후에 대리청정 중인 세자, 훗날 경종의 승인을 받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숙종실록』 44년 11월 12일). 이로 보아서 태백산성의 축성은 1719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본래 태백산성은 평산의 읍치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따로 별장(別將)을 두지 않고 평산부사가 직접 관리하였다. 영조 때에 태백산성의 방어상 중요성이 강조되어 잠시 평산에 있던 영장(營將)을 금천으로 옮기고 평산부사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게 하여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우의정김약로(金若魯)가 산성이 지나치게 좁아 일시적으로 대피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해 다시 평산부사는 읍치에 거주하게 되었다.

현재 문루 등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북한의 국보문화유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형태

태백산성은 태백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높은 분지를 둘러싸듯이 성벽을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동쪽의 성벽은 예성강 연안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2.425㎞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7m이다. 성벽은 4각추 형태의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성 아래에서부터 4단까지는 계단식으로 쌓았고, 그 위부터는 성 돌의 면과 선을 맞추어 곧게 쌓았다.

방어시설로 치(雉)와 성가퀴를 만들었는데, 치의 경우 5개소에 너비와 길이가 모두 4.55m의 규모로 설치하였다. 성가퀴는 현재 흔적만 남아 있으며, 206개의 타구(垜口)와 1,031개의 활을 쏘는 구멍, 1,026개의 포를 쏘는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사방에 홍예문으로 만들었는데, 동문과 서문에는 18세기에 고쳐 세운 문루가 아직 남아 있다. 서문은 임진왜란 후인 1770년에, 동문은 177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축대는 성벽을 조금 보강한 것이고 주변의 성벽이 한 단 뒤로 후퇴하여 성문이 놓이는 형식이다. 이렇게 하여 동문의 좌우 성벽은 자연스럽게 옹성의 역할을 하게 되는 매우 효과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성안에는 비교적 많은 우물과 연못이 있어 물을 확보하기 용이하도록 하였다. 또한 높은 지대에는 장대를 설치하여 방어하기 편리하도록 하였고, 소금·군량·무기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안에 고려 태조의 측근 신하였던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유금필(庾黔弼)·배현경(裵玄慶)을 제사 지내던 태사사(太師社)가 있었다. 정조가 이름을 짓고 편액을 내렸는데, 당시는 고려 공신(功臣)들의 철로 된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선유물유적도감편찬위원회, 『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내지 방어체계」, 『한국문화』38,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6.
  • 나경준, 「조선 숙종대 관방시설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황부연, 「조선후기 산성 수축과 운영의 재정구조」,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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