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주(濁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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멥쌀로 지은 밥에 누룩을 넣고 빚은 술로 맑은 술을 떠내지 않고 걸러서 만든 술.

개설

멥쌀로 지은 밥에 누룩을 넣고 빚은 술을 술독에서 잘 익힌 후 위의 맑은 술을 떠내지 않은 채 걸러서 만든 술을 말한다. 술의 색이 맑지 않고 탁(濁)해서 생긴 이름이다. 농민들의 술이라 하여 농주(農酒)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한글로는 조선시대부터 ‘막걸리’라고 했다. 마구 걸러서 만든 술이라는 뜻이다. 금주령을 내려도 가난한 백성들의 술인 탁주(濁酒)만은 예외로 쳤다. 탁주를 마시면 시장기를 잠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드는 법

조선시대에 탁주 만드는 법에 대해 상세하게 적은 요리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도 오래되어 변한 탁주를 새로 담그는 법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을 뿐이다. 아마도 너무나 쉽게 만들 수 있었던 술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양반집에서는 개별적으로 탁주를 만들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마을 단위로 만들었다. 고종 때 병인양요에서 선비들과 백성들이 군사들을 도운 물품 목록에는 곡식이나 부식, 땔감 등 대부분의 물품은 개인별로 제공하였지만 탁주만은 마을 백성들이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종실록』3년 10월 20일). 마을에 잔치나 상사(喪事)가 있을 때도 공동으로 탁주를 빚었다.

1924년에 출판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소개된 탁주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일상의 막걸리는 하등(下等)의 쌀이나 싸라기를 한 말가량 절구에 찧어 굵은 체에 쳐서 짜내어 식힌 후에 항시 사용하는 누룩 넉 장 가량을 찌어 섞되 여름에는 반 장쯤 더 넣는다. 물은 맑은 술보다 더 붓고 덮어 두면, 겨울에는 열흘 동안이요, 여름에는 이레 동안이면 거르되 술 맛을 보아 가며 물을 치느니라.”고 했다. 또 “이렇게 빚은 술이라도 닷 되만 술밑을 하고 닷 되는 지에밥[고두밥]처럼 지어서 위를 덮으면 매우 좋으니라.”고 적었다.

또 다른 만드는 법으로 “묵은 멥쌀을 좋은 것으로 맑은 물이 나도록 씻고, 누룩도 햇볕에 여러 날 보이고 밤에 이슬 맞혀 물에 수비하여 술밑을 담근 후에 찹쌀을 지어 쪄서 위를 덮은 후에 한 열흘 지나서 굵은 체에 거르고 고운 체에 밭치면 빛도 곱고 홀홀하고 맛이 좋으니 이것을 이르기를, ‘찹쌀지에밥’이라 하는 것이다. 밥 먹기 전 해장에는 약주보다 매우 나으며 소주로 해장하는 것은 단명할 방법이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물을 적게 하면 독하니 짐작할 것이요 제일 물이 좋아야 술맛이 극품이 되느니라. 명주 전대에 짜서 내면 더욱이 맑게 되느니라.”고 했다.

연원 및 용도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탁주를 ‘백주(白酒)’ 혹은 ‘박주(薄酒)’라고 표현했다. 술이 흰색이기 때문에 ‘백주’라고도 했고, 술 도수가 약해서 ‘박주’라고도 했다. 또 술지게미를 가리키는 말로 ‘요(醪)’를 사용하면서 이 술지게미에 물을 부은 술을 ‘탁료(濁醪)’라고 불렀다. 또 탁주에 솔을 넣은 술을 ‘송료(松醪)’라고 했다. 이규보는 젊어서 높은 벼슬에 나가지 못할 때는 주로 박주를 마셨다는 시를 남겼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작자 미상의 어휘사전인 『광물재보(廣才物譜)』에서는 탁주는 한글로 ‘막걸니’라고 표기하였다. 비슷한 말로 혼돈주(混沌酒), 노주(老酒), 춘주(春酒), 준순주(逡巡酒), 예수(醴洙), 백말(白末) 등을 언급했다. 혼돈주는 색이 흐려서 나온 이름이고, 노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 노인들도 즐겨 마시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탁주는 주로 백성들이 마시는 술이었다. 태종 때 관료들과 양반들의 연음(宴飮)을 금지하면서도 백성들이 마시는 탁주에 대해서는 금지하지 않았다(『태종실록』 15년 1월 25일). 세종 때 전면적인 금주령을 내렸을 때 관료들과 양반들은 집에 문을 걸어 잠그고 술을 마셔서 잡히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탁주를 판매하는 사람만 잡혔다. 그래서 금주령을 정지시켰다(『세종실록』 7년 4월 17일). 왕실에서 금주령을 내린 이유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주지육림은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향락이 극에 달한 방탕한 생활을 이르는 말이다. 한편 세종은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맞이하여 기로(耆老)와 재추(宰樞)에게 탁주를 내려서 연회를 개최하였다(『세종실록』 11년 9월 9일).

군사들에게 상으로 내려주는 술로는 탁주가 으뜸이었다. 성종 때에는 왕이 강무(講武) 겸 사냥을 위한 행차 중에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좌상군(左廂軍)과 우상군(右廂軍)에게 탁주 200병을 내렸다(『성종실록』 6년 9월 29일).

영조는 특히 금주령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1755년(영조 31) 정월부터 서울과 서울 바깥에서 술을 빚지 말라는 전교(傳敎)를 내렸다. 다만 군인에게 내려주는 술로는 오로지 탁주만을 쓰고, 농민들에게는 보리로 빚은 술과 탁주에 대해서는 금주령의 대상이 아니라고 윤음(綸音)을 내렸다(『영조실록』 31년 9월 8일). 그러다 며칠 후에 다시 탁주도 금주령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지시를 내렸다. 시골의 마을에서 만드는 탁주는 서울의 제사용 술인 지주(旨酒)와 같은 급수의 술이니 형평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군인에게 내리는 술과 제주(祭酒)나 농민들의 술로 예주(醴酒)를 사용하고 탁주를 사용치 못하게 했다(『영조실록』 31년 9월 14일).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구황(賑荒)」에서 소주(燒酒)를 만드는 데는 곡식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반드시 법으로 금지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반적으로 탁주는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술이기 때문에 금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탁주는 쌀농사를 주로 지었던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빚었던 술이다.

참고문헌

  • 『광재물보(廣才物譜)』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 휴머니스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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