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소북(濁小北)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선조 후반 북인의 한 지류인 소북 가운데 유영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 당파로, 탁북이라고도 함.

개설

선조 후반에 소북(小北)은 영수 격인 남이공(南以恭)과 유영경(柳永慶) 사이에 틈이 벌어져 다시 분당되었다. 전자를 중심으로 한 당파를 청소북(淸小北) 또는 청북, 남당(南黨)이라 하고, 후자를 중심으로 하는 당파를 탁소북(濁小北) 또는 탁북(濁北), 유당(柳黨)이라고 하였다. 1608년의 사론에, "유영경이 나라의 권력을 잡았을 때는, 김신국(金藎國)·남이공이 모주(謀主)가 되더니만, 영경이 패한 뒤에는 김신국과 남이공이 맨 먼저 제창하여 창을 거꾸로 잡고 공격하면서 깊이 희분(希奮)과 결탁하여 날뛰고 기탄없이 굴었다. 청북(淸北)이니 탁북(濁北)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 내어 영경과 다르다는 것을 보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4월 21일]고 하였으며, 1610년의 실록 기사에는, "당초 유영경의 당(黨)을 소북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소북 중에 또 청북(淸北)과 탁북(濁北)이 있었다. 대개 그 중에서 다소 강직하여 스스로 염치가 있다고 하는 자를 사람들이 청북이라고 칭하고, 그 나머지 무리를 탁북이라 이르니 김대래와 같은 무리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3월 9일)고 하여, 유영경은 1608년 사망하였지만, 그의 영향력으로 탁북이 형성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실록에는 "소북 중에는 또 청북과 탁북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3월 23일). 『연려실기술』에는 "임인년(1602년)에 유영경이 정승으로 들어와서 등용한 것은 모두 소북이었다. 정권을 잡은 7년 동안 남이공 등은 다시 기용되지 못하다가 영경이 패하게 되자 이공 일파가 미리 그 기미를 알고 대립하는 형상을 취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공의 무리를 청소북(淸小北)이라 하고 영경의 무리를 탁소북(濁小北)이라 지목하였다."고 하여, 남이공과 유영경의 정치적 대립이 청소북과 탁소북 분당의 주요 원인임을 기록하고 있다. 『당의통략』에는 탁소북의 주요 인물로 최천건(崔天健), 김대래(金大來), 유영근(柳永謹), 박이장(朴而章), 황섬(黃暹), 신광립(申光立) 등을 들면서, "무도 유영경을 지지하여 유당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당의통략(黨議通略)』
  • 강주진, 『이조당쟁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1·2, 동방미디어, 2000.
  • 한명기,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
  • 구덕회, 「선조대 후반(1594~1608) 정치체제의 재편과 정국의 동향」, 『한국사론』20, 198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