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부(漆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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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지역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칠곡부(漆谷府) 즉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는 1640년(인조 18)에 가산산성(架山山城)을 수축하면서 신설되었지만, 그 기원은 신라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칠곡(七谷)은 고려시대 이래 팔거현(八莒縣)의 별칭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는 팔리현(八里縣)이라 하였으며, 수창군(壽昌郡: 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일원)의 영현(領縣)이었다. 고려에 팔거현은 경산부(京山府: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일원)의 속현(屬縣)이었고, 조선시대에도 경산부의 후신인 성주목(星州牧)에 그대로 소속되어 합병되었다. 1640년에 부활 후 칠곡부의 지방관으로는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임명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칠곡군(漆谷郡)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칠곡군은 가산산성이 있던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나, 1819년(순조 19)에는 그 중심부가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일대로 옮겨 갔다. 1914년 이후에는 현재 칠곡군 왜관읍 지역이 칠곡군의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칠곡도호부는 1640년(인조 18)에 세워졌지만(『인조실록』 18년 5월 25일) 그 기원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팔거리현은 경덕왕 때 팔리현으로 개명하였으며, 신라 9주 중 하나인 양주(良州) 수창군의 영현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팔거현으로 개명하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산부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경산부는 성주목으로 개명하였는데, 팔거현은 그대로 성주의 속현으로 남아 있다가 성주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와 옛 팔거 땅에 있는 가산에 산성을 쌓았는데, 성주 읍치와의 거리가 멀었던 까닭에 별도의 고을로 삼고 칠곡도호부라 이름 붙였다. 칠곡(七谷 혹은 漆谷)은 고려시대 이래 팔거의 별호(別號)로 불리던 명칭이다.

조직 및 역할

칠곡부의 전신인 신라시기의 팔리현은 신라 9주 중 양주의 관할 하에 있던 수창군의 영현이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팔거현으로 개명하였는데, 경산부의 속현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경산부는 성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팔거현 지역은 그대로 성주에 속해 있다가 성주에 병합되었다.

성주에 병합되어 사라졌던 팔거현은 1640년에 칠곡도호부가 설치되면서 부활하였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3품의 무관(武官)이 도호부사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20명, 수첩군관(守堞軍官) 520명, 인리(人吏) 30명, 지인(知印) 15명, 사령(使令) 5명, 군뢰(軍牢) 6명, 관노(官奴) 19명, 관비(官婢) 29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3품의 도호부사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1640년에 칠곡도호부를 설치한 이후 한동안 특별한 연혁의 변동은 없었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칠곡군으로 변동되어 대구부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칠곡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칠곡군은 존속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칠곡부의 관아와 읍치는 원래 가산산성 내부, 즉 현재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었으나, 1819년(순조 19)에 팔거창이 있던 옛 읍치, 즉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지역으로 옮겼다(『순조실록』 19년 5월 25일).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현재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