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목(忠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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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와 제천군, 괴산군, 경기도 음성군 등지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충주목(忠州牧)은 충청도의 계수관으로 충청감영이 있었다. 삼국시대 557년(신라 진흥왕 18)에 5소경 가운데 하나인 국원소경(國原小京)을 두었다. 고려시대 983년(고려 성종 2)에 최초로 12목을 설치할 때 충주목이 되었다. 15세기에 호수는 1,871호, 인구는 7,452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440명, 선군(船軍) 465명이었다. 토지는 19,893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1/3 정도를 차지하였다. 1895년(고종 32)의 23부제 개혁 때 충주부가 되었으며, 1896년(고종 33)에 충청북도의 수부(首府)가 되었다. 1914년에 충주군이 되었고, 1956년에 충주시로 승격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충주는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이었다. 신라가 진흥왕 때 소백산맥 이북으로 팽창하면서 충주를 점령하였다. 557년에 국원소경을 설치하고 귀족의 자제와 경주 6부의 호민들을 충주로 이주시켰다. 삼국시대에 충주는 소백산맥을 관통하는 계립령과 죽령길이 통과하는 곳인 데다 남한강 상류의 수로를 장악하여 한성으로 이르는 통로로서 신라의 북진 거점이었다. 이후로 충주는 삼국의 패권 다툼과 신라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충주는 충청 지역에서 행정,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라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국원성을 축성하였다. 통일 후에 국원소경은 한산주에 소속되었다. 통일신라시대 742년(신라 경덕왕 1)에 한산주를 한주로 개칭하고 국원소경을 중원경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983년(고려 성종 2)에 최승로의 건의로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충주목이 되었다. 남한강 유역 대부분이 충주목 관할이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국에 12주 절도사를 설치할 때 충주(忠州) 창화군(昌化軍)이 되었다. 1012년(고려 현종 3)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안무사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전국을 4도호부 8목 56지주군사 체제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8목의 하나로 충주목이 되었다. 이후 5도제를 시행하면서 충주는 양광도 소속이 되었다.

조선에서도 충주목을 계승하였다. 충주는 충청감사가 주재하는 충청감영의 소재지가 되어 충청도의 행정·경제·군사·교통·조운·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충주목에 소속된 군현으로는 단양군·청풍군·괴산군 3개 군과, 영춘현·제천현·음성현·연풍현의 4개 현이 있었다. 조창으로서 경상도의 조세를 모으는 경원창과 덕흥창이 있었다. 1470년(성종 1) 이전까지 충청도의 조세는 모두 경기도에 납부하였는데, 충주에 새로 가흥창을 설치하고 청안·진천·청산·보은·옥천·황간·영동·음성 등의 조세를 가흥창에 납부하면 가흥창에서 남한강 수로를 이용해서 바로 용산창으로 수운하게 하였다.

충주는 군사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1458년(세조 4)에 진관 체제를 시행하였을 때 충주 진관은 목사가 충주진병마첨절제사를 겸하였다. 조선시대에 충주의 군사적 의미는 삼국시대와 달리 남쪽에서 적이 침공해 올 때 소백산맥을 차단하고 방어하는 거점으로서 중시되었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가 벌어졌고, 충주성은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조선말기에 일본과 서구세력의 위협이 증대되자 1869년(고종 6)에 충주성을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조직 및 역할

충주에는 정3품 목사 1인을 두었다. 세종대에 겸목제를 시행할 때는 충주목사가 충청도관찰사를 겸하였다. 속관으로는 종5품 판관 1명과 유학교수관 1명이 있었다. 진관 체제의 시행과 함께 충주에는 종3품 첨절제사를 두었다. 충주에는 조선초기에 해인사에서 옮겨 온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 사고를 관리하기 위해 수호관 5명, 별색(別色)·호장(戶長)·기관(記官)·고지기(庫直) 각 1명을 두었다. 관속으로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좌수 1명, 별감 3명, 겸역군관 80명, 아전 49명, 지인 34명, 사령 36명, 관노 42명, 관비 12명, 관기 20명이 속해 있었다. 이 정원은 충주현으로 강등되었을 때의 인원으로 실제 목 체제에서는 증원되었을 것이다.

영장제를 시행하면서 종3품 영장겸토포사를 설치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정3품 진영장(鎭營將)을 두었다는 내용이 있다. 진영장은 충청도에 전·후·좌·우·중영장 5명이 있었는데, 충주에는 후영장을 두었다. 영장 휘하에 군관·수관·훈도가 배치되었고, 그 밖에 진리(鎭吏) 4명과 지인 20명이 있었다.

변천

1549년(명종 4)에 충주 사람 이홍남(李洪男)이 동생 이홍윤(李洪胤)이 왕을 비방하는 무도한 말을 하고 역모를 모의했다고 고변하였다(『명종실록』 4년 4월 18일). 이 사건으로 죽거나 귀양 간 자가 40~50명이었고, 충주목을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하고 충청도를 청홍도(淸洪道)로 이름을 고쳤다. 1567년(선조 즉위)에 충주로 복구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유인발의 역모 사건으로 충원현(忠原縣)으로 강등하였다가, 1623년(인조 1)에 복구하였다. 인조대에 다시 충원현으로 강등하였다가 1653년(효종 4)에 10년의 기한이 지나서 충주목으로 환원하였다. 1738년(영조 14)에 충주 사람이 지아비를 시해(弑害)한 사건이 발생해서 충주목을 다시 충원현으로 강등하였다가(『영조실록』 14년 12월 3일) 10년 뒤에 복구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충원현으로 강등하고 충청도를 공청도(公淸道)로 바꾸었다. 1826년(순조 26)에 10년의 기한이 지나서 충주목과 충청도로 복구하였다.

충주목은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큰 읍이었다. 충주목에는 38개 면이 있었고, 209~226개의 리(里)가 속해 있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서는 가호가 20,076호, 인구가 107,693명으로서 충주 역사상 가장 많은 호구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조금씩 줄어들어서 1870년(고종 7)에는 가호가 18,124호에 45,102명으로 1759년보다 57.8% 감소했다. 1902년(고종 39)의 『충주군양안(忠州郡量案)』에 의하면, 호수는 24,185호였으며, 토지는 밭 7,301결, 논 8,522결이었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할 때 충주목은 충주부가 되었다. 1896년에 전국에 13도제를 시행하면서 충청도를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나누었다. 이때 충주부가 충청북도의 수부가 되어 충청북도관찰사의 소재지가 되었다. 관할 구역은 충주·음성·연풍·괴산·제천·청풍·영춘·단양·진천·청안·여주·용인·죽산·음죽·이천·양지·원주·정선·평창·영월군으로 충청북도 북부와 경기도 일부, 강원도 남부 지역 20개 군이었다. 1908년(순종 1)에 충청북도관찰사가 청주로 이전되었다. 1914년에 충주부를 충주군으로 삼았고, 1956년에 충주시로 승격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충주군양안(忠州郡量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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