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휘전(春暉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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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서궁 만수전의 별전이자 훗날의 선원전이 된 전각.

개설

1654년(효종 5)에 효종은 병약했던 장렬왕후를 위해 창덕궁 후원에 있던 작은 별당인 수정당을 새롭게 단장해 대비전각으로 꾸미고 모셨다. 그런데 바로 다음 해에 대신들과 면대하는 자리에서 수정전을 대신할 동조를 다시 지을 계획이 있다고 전교를 내렸다. 동조란 대비마마가 임어하여 살기 위한 거처, 즉 대비전을 말하는데, 불과 한 해 만에 또다시 동조의 건립 계획을 들고 나온 왕의 전교에 대신들은 동의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왕은 대신들의 이러한 반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치 궁궐 안에 새로운 궁 하나를 짓는 것 같은 대규모 동조의 건립을 시작했다. 그렇게 1657년(효종 8)에 마련한 것이 창덕궁의 서궁 영역, 즉 만수전(萬壽殿)이다. 이때 만수전과 함께 별전 건물이 조성되었는데 이 전각이 춘휘전(春暉殿)이다. 효종·현종·숙종 내내 장렬왕후가 임어하는 거처였던 만수전은 1687년(숙종 13)에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다행히 춘휘전의 영역은 화를 면하였다. 그러했던 까닭에 춘휘전은 훗날 선원전으로 전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만수전은 창덕궁의 서쪽 후방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했다. 춘휘전은 만수전의 남쪽에 인정전 뒷마당과 나란한 위치의 서쪽에 놓였고, 춘휘전 마당의 동쪽에는 화계가 놓였다. 그리고 부속채로 양지당(養志堂)을 동쪽 마당에 두었다. 정면의 남쪽 행각에는 정문인 연경문(衍慶門), 서쪽 담장에는 정숙문(正肅門), 동쪽 담장에는 양지당과 연결되는 보춘문(報春門)이 있었으며, 마당 뒤편 북쪽 담장에는 영휘문(永輝門)이 있었다.

장렬왕후의 정전은 만수전이었기 때문에 의례를 행하는 장소는 정전인 만수전이었고, 의례가 끝난 후 축원의 술잔을 받는 곳은 별전인 춘휘전이었다(『현종개수실록』 2년 7월 27일). 장렬왕후가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는 정전을 벗어나 춘휘전에서 거애하였다(『현종실록』 4년 10월 25일).

변천 및 현황

춘휘전은 1657년에 효종에 의해 만수전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687년에 만수전 영역이 화재를 당해 전소되었다. 다행히 춘휘전과 양지당은 화를 면하였다. 이후 1695년(숙종 21)에 춘휘전의 이름을 선원전으로 바꾸었고 어진을 봉안하고 왕의 물품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전용하였다. 1900년대 초까지는 주변 건물들과 함께 비교적 잘 유지되었으나, 1921년에 대보단 영역에 신선원전이 건립되자 일대는 폐허가 되었고, 선원전만 겨우 보존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2004년 창덕궁 서쪽의 궐내 각사 및 구선원전 주변이 복원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형태

효종대에 만수전을 지을 때 민폐를 줄이고자 경덕궁의 승휘전, 어조당, 만상루, 협화루 등을 헐어다 지었고, 춘휘전은 경덕궁의 경화당을 옮겨 지었다. 『만수전수리도감의궤』에 따르면, 춘휘전의 규모는 전체 20칸 규모이며, 그중 온돌이 6칸, 마루가 14칸인데, 사방에 행각과 월랑을 두었다. 그리고 사면에 모두 퇴를 둘렀다. 전각이 선원전으로 전용된 이후, 중간에 수개하는 역사가 있었으므로 약간의 변형이 있었을 것인데, 그 모습이 「동궐도」에 남아있는 선원전의 모습이다. 이는 현재 창덕궁에 보존된 구선원전으로 지칭되는 전각의 형태이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
  • 『궁궐지(宮闕志)』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문화재청,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 권역 복원수리보고서」, 문화재청, 2005.
  • 조옥연, 「조선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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