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첩자(春帖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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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날 대궐 또는 집안의 기둥이나 대문에 써 붙이는 글귀.

개설

춘첩자(春帖子)는 궁궐에서 입춘을 맞이하여 대궐 안의 전각 기둥에 써 붙이는 주련(柱聯) 글이다. 제술관(製述官)에게 명하여 하례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이를 꽃무늬가 들어 있는 종이에 써서 기둥이나 대문에 붙인다. 첩자(帖子)는 입춘이나 단오에 축복하는 글을 써서 기둥에 붙이는 것이다. 입춘에 써서 붙이는 것을 춘첩자라 하고, 단오절에 써 붙이는 것을 단오첩자(端午帖子)라고 한다.

입춘 날 대궐 안에만 춘첩자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재상집, 양반집, 일반 민가 및 시전에서도 모두 집 기둥이나 바람벽에 춘련(春聯) 시구를 써 붙이고 한 해 일이 잘되기를 기원한다. 이것을 춘축(春祝)이라고 한다. 절일첩(節日帖)이란 춘첩자·연상시(延祥詩)·단오첩(端午帖)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서, 주로 원단(元旦)·입춘·단오 등 명절에 대궐 안 기둥에 써 붙이는 시나 주련을 말한다.

연원 및 변천

중국양(梁)나라 종름(宗懍)이 6세기경에 지은 세시기인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입춘 날에는 ‘의춘(宜春)’이란 두 자를 문에다 붙인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춘련이나 춘첩자에 해당하여 그 연원이 깊음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르기를, “고려의 광화문은 왕부(王府)의 편문(偏門)인데, 춘첩자가 걸려 있다.”고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集)』에는 고율시(古律詩)로 사문(私門)의 춘첩자와 어전의 춘첩자가 모두 실려 있어 이것이 왕실뿐 아니라 사가에서도 주련으로 붙여졌음을 알 수 있다.

1425년(세종 7) 12월 1일에 왕이 “금후(今後)로 춘첩자에 적을 영상시(迎祥詩)는 매년 새로 짓게 하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7년 12월 1일). 1719년(숙종 45) 12월 20일 대신(大臣)과 비국(備局)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한 자리에서 우의정이건명(李健命)은 “춘첩자에 쓸 영상시를 지어 바칠 때 대제학이 패초(牌招)받아 대궐에 나아가 운을 내면 뽑힌 자들도 대궐에 나아가 지어서 바치는 것이 원칙인데, 근래에는 모두 집에서 지어서 보낸다고 하니 이번 입춘부터 춘첩자는 마땅히 궐중에 나아가서 지어 바치게 하소서.”하고 건의하였다(『숙종실록』 45년 12월 20일).

1767년(영조 43) 11월 26일에는 왕이 춘첩자와 연상시를 그만둘 것을 명하였다(『영조실록』 43년 11월 26일). 그러나 1781년(정조 5) 2월 13일에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에게 첩사(帖詞) 두 편씩을 찬술하게 하였는데, 연상첩자(延祥帖子)를 지어 올리는 것이 단지 송도(頌禱)하는 뜻만이 아니라 잠규(箴規)의 뜻이 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정조실록』 15년 2월 13일).

형태

입춘 며칠 전에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당하관 시종(侍從)과 초계문신 중 각 대전과 궁에 붙일 춘첩자를 지을 제술인 명단을 임금에게 올리고 대제학에게는 오언율시와 칠언율시 및 절구의 운을 각기 한 편씩 출제하게 한다. 그리고는 과거 시험처럼 삼하(三下) 이상의 점수를 합하여 입격자를 뽑는데, 분배(分排)의 표지로 채워 넣은 글머리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를 세어 그 수대로 베껴 제출하게 한다. 춘첩자를 쓸 종이는 길고 넓은 닥종이를 써서 세로로 자른 다음 검정색 실 무늬의 큰 테와 위로 연잎, 아래로 연꽃을 새긴 문양 판을 찍어 만든다. 각신(閣臣)은 제학부터 대교까지 각자의 뜻에 따라 짓고 각 문체로 써서 올린다.

여염과 시전(市廛)에서도 모두 전지(剪紙)에 입춘이라고 써서 기둥과 문 상방에 붙인다. 혹은 입춘 대신 시사(詩詞)를 쓰기도 하는데, 새봄을 축하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는 뜻을 담은 것은 궁전의 춘첩자와 같다.

참고문헌

  • 『경도잡지(京都雜誌)』
  • 『고려도경(高麗圖經)』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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