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득수(崔得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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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5년(인종 1)~1616년(광해군 8) = 72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효자. 정문(旌門) 복호(復戶)되었다가 폐기되었다. 자는 덕수(德叟)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서울 출신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라도 영암(靈岩)에서 경기도 양주(楊州)로, 양주에서 다시 서울 용산(龍山)으로 피난하였다. 아버지는 봉사(奉事)최언청(崔彥淸)이다. 연촌(烟村)최덕지(崔德之)의 6대손이다.

선조 시대 활동

최득수가 서울 동부 어의동(於義洞)에 살 때 포저(浦渚)조익(趙翼)의 집안과 서로 대문을 맞대고 살았다. 두 집안이 서로 왕래하면서 살아서 마치 피를 나눈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때 최득수의 아들 3명 중에 막내 최응형(崔應亨)은 조익과 소꿉친구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 사람들이 도성(都城)을 빠져나가서 피난할 때 두 집안도 동대문을 빠져나가 조익의 외가에서 하루밤을 묵고, 서로 헤어져 따로 피난길에 올랐다. 전쟁 중에 두 집안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최득수는 나이 80세의 노모(老母)를 모시고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삭녕(朔寧)으로 피란하였다. 노모가 병으로 죽자, 산중에 임시로 묻어 두고, 1년 동안 주야로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묘지명에는 “왜적도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그를 해치지 않고 살길을 일러 주었다”고 하였다.(『포저집(浦渚集)』 권33 「최처사 득수 묘지명(崔處士得壽墓誌銘)」 참고. 이하 「최득수 묘지명」이라 약칭함.) 피난지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1593년(선조 26) 가을 금천(衿川: 시흥) 선영에 어머니를 장사지낸 다음에,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면서 죽만 마시고 여묘(廬墓)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의 애절한 통곡과 수척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최득수는 5대조 연촌최덕지가 문종 때 관직을 사임하고 은둔한 전라도 영암으로 내려가서 살았는데, 영암 사람 전 현감문익주(文益周) 등 20여 명이 연명(連名)하여 전라도관찰사에게 최득수를 정표(旌表)하라고 정소(呈訴)하였다. 1603년(선조 36) 3월 전라도관찰사한준겸(韓浚謙)이 조정에 이 사실을 장계(狀啓)하니, 선조가 그 집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관직을 주라고 명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

최득수가 경기도 양주에서 살 때 양주 사람들이 또 관찰사에게 진달하여, 경기도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자, 선조가 복호(復戶)해 주라고 명하였다. 그가 서울 용산(龍山)에서 살 때 용산 사람들이 그의 효행에 관해 예조에 또 글을 올렸다. 그러나 예조에서 너무 자주 효행을 상소한다고, 앞서 두번의 포상을 모두 폐기해 버렸다.(「최득수 묘지명」 참고.)

조익은 1609년(광해군 1) 최득수를 서울 남대문 밖 용산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때 조익의 친구였던 최응형은 사마시에 급제하였을 무렵이었다. 20여년 후에 조익은 찰방최응형을 만나게 되었는데, 최응형에게서 그 아버지 최득수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때 조익은 최득수가 1616년(광해군 8) 72세의 나이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묘지명에 이를 적어 두었다.

성품과 일화

최득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평생 동안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다. 누구나 그의 모습을 한번 보면, 그가 순수하고 선량하여 털끝만큼도 사특(邪慝)한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최득수는 80여 세가 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가다가, 삭령(朔寧)에 이르러 어머니가 병이 나서 죽었다. 그러자 임시로 산중에다 초빈(草殯)을 해놓고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울부짖으며 통곡하다가, 왜적이 이르자, 혼백(魂帛)을 상자에 넣어 등에 짊어지고 숲 속에 숨어 있었다. 왜적이 수색하다가 최득수를 발견하고 해치려고 하다가, 그가 짊어진 상자를 보고 기이한 보배가 있는 줄로 알고, 그 상자를 빼앗아서 열어보니, 그 어머니 혼백이 들어 있었다. 그 왜적도 감동하여, 최득수에게 도망하여 살아날 길을 가르쳐 주면서 빨리 도망가라고 재촉하였다. 이리하여 최득수는 어머니의 혼백 상자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최득수 묘지명」 참고.)

그 이듬해 1593년 가을철에 최득수가 어머니를 금천의 선영에다 반장(返葬)한 다음에, 묘소 곁에다 상막(喪幕)을 지어놓고,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하루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전란을 겪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리다 못해 도적이 되어서 살인과 약탈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배고픔에 지쳐서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였는데, 경기도가 더욱더 심하였다. 그러나 최득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혼자 상막을 지키며 산중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곡읍(哭泣)하며 슬퍼하는 최득수의 야윈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최득수 묘지명」 참고.)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 금정리(金正里)의 언덕에 있는데, 포저조익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포저집(浦渚集)』 권33 「최처사 득수 묘지명(崔處士得壽墓誌銘)」 참고. ) 나라에서 그 집에 정문(旌門)하고 복호(復戶)하였다가, 나중에 예조에서 폐기하였다.

부인은 청송심씨(靑松沈氏)인데, 자녀는 3형제를 두었다. 큰아들은 최응성(崔應聖)이고, 둘째 아들은 웅천 현감(熊川縣監)을 지낸 최응선(崔應善)이며 막내아들은 소촌 찰방(召村察訪)을 지낸 최응형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포저집(浦渚集)』
  •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