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계군(草溪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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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초계군(草溪郡)은 신라의 초팔혜현(草八兮縣)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팔계현(八谿縣)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초계현(草溪縣)이 되어 합주(陜州: 현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일대)의 속현(屬縣)으로 편성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지방관인 감무(監務)가 처음으로 파견되었으며, 1316년(고려 충숙왕 3)에 초계군으로 승격하고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초계군이라 불렸으며, 1466년(세조 12)부터는 지군사가 군수로 바뀌어 조선말기까지 이어졌다. 1914년에 초계군은 합천군(陜川郡)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 초계군은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초계군은 신라의 초팔혜현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팔계현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초기에 초계현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초계현은 합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에 감무가 처음 파견되었다. 1316년에 초계군으로 승격하고 지군사가 파견되었다. 초계군은 조선 건국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후 1466년에 지군사는 군수로 개칭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직 및 역할

초계군은 신라 경덕왕 때 팔계현이라 불렸으며, 9주 중 강주(康州)의 관할하에 있던 강양군(江陽郡: 현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일대)의 영현(領縣)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팔계현에는 지방관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초계현으로 개명되고 합주의 속현으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초계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초계현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1172년에 초계현에는 지방관인 감무가 처음으로 파견되었고, 1316년에 초계군으로 승격하여 지군사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초계군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1466년에 지군사가 군수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초계군수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종4품의 군수와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6품의 무관(武官)이 군수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50명, 인리(人吏) 30명, 지인(知印) 10명, 사령(使令) 12명, 관노(官奴) 14명, 관비(官婢) 10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종4품의 군수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과 달리 『여지도서』에서만 군수가 6품관이었다고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초계군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초계리 지역에 위치하였다.

변천

초계군에서는 조선시대에 별다른 연혁의 변동이 확인되지 않는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초계군은 진주부(晉州府)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초계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초계군은 경상남도 합천군에 병합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