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계(淸風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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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운동 일대의 자연경관이 수려한 계곡.

개설

청풍계는 인왕산(仁王山) 아래 청운동의 일부 계곡을 포함한 지명으로 한양에서 자연 경치가 좋기로 알려진 곳이었다. 예부터 문인들과 묵객들이 자주 방문하여 시회(詩會)를 개최하였다. 또한 이 일대에 김상용(金尙容)이 거처를 마련하면서 경사스러운 날이면 친척과 친구들과 함께 자연의 풍경을 관람하며 즐겼다.

명칭 유래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청운동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으로 원래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푸른 단풍나무가 있는 계곡이라는 의미의 ‘청풍계(靑楓溪)’라고 불리다가 선조 때 선원(仙源)김상용이 이곳에 집터를 물려받으면서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자연 환경

청풍계는 도성의 주산 백악산(白岳山)과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仁王山)이 만나는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깊은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진귀한 바위들이 즐비하며 주위에는 수림(樹林)과 화초도 많았다. 청풍계를 비롯하여 세심대(洗心臺), 유란동(幽蘭洞), 도화동(桃花洞), 대은암(大隱岩), 만리뢰(萬里瀨) 등이 모두 이 부근에 있는 명소이다.

형성 및 변천

청풍계는 김상용의 거처이자 별서지를 만들면서 유명해졌다. 청풍각(淸風閣), 와유암(臥遊菴), 태고정(太古亭) 등을 짓고 주변 바위에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자를 각각 송시열(宋時烈)과 주자(朱子)의 글씨로 새겼다. 이후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자주 찾아 시를 읊조리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회사가 이곳을 점령하여 내[川]를 메우고 바위를 깨뜨려 자연경관을 훼손하였다. 현재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각자만 청운동 암벽에 남아 있다.

위치 비정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에 위치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으로, 청운초등학교 뒤쪽 일대에 속한다. 원래 김상용의 종증조 김영(金瑛)이 서울로 이주하며 자리 잡았다가 김상용이 물려받아 조성된 집터이다. 별서지로 문인과 학자, 예술인 등이 주로 머물렀다.

관련 기록

김상용과 그 측근들인 호조 판서김신국(金藎國), 병조 판서 이상의(李尙毅), 판돈녕부사민형남(閔馨男), 예조 판서이덕형(李德泂), 최희남(崔喜男), 형조 판서이경전(李慶全), 이필영(李必榮) 등 7인이 봄을 감상[賞春]하고 시회(詩會)를 즐기는 계모임을 한 뒤 김신국이 지은 발문(跋文)과 참석한 7인이 지은 14편의 시문, 그리고 청풍계 일대를 그린 그림 등을 모아 『청풍계첩淸楓契帖』을 만들었다.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金尙憲)은 ‘청풍계 위의 태고정(太古亭)은 우리 집의 큰 형님이 지어 놓은 곳으로 숲과 골짝이 의연히도 수묵도(水墨圖)와 같거니와, 바위 절벽이 절로 푸른 옥병풍(玉屛風)을 이루었네. 우리 부자 형제들이 한 집에 앉아서, 바람과 달과 거문고와 술로 사시사철을 즐기었네. 그 좋던 일 지금 와선 다시 할 수 없거니와, 이러한 때 이런 정을 어떤 이가 알 것인가.’라고 청풍계에 대한 시를 남겼다.

1790년(정조 14)에 정조는 육상궁(毓祥宮)과 선희궁(宣禧宮) 등을 참배한 다음 고(故) 김상용의 집이 있는 청풍계에 들러 그곳에 있는 태고정에서 잠시 쉬었다. 이때 정조는 김상용의 후손도 만나보고 벼슬을 주도록 하였고 그 집도 수리해 주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4년 2월 28일).

참고문헌

  • 『국도팔영(國都八詠)』
  • 『선원연보(仙源年譜)』
  •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
  • 『한경지략(漢京識略)』
  • 『조선일보(朝鮮日報)』, 「동리산책」, 1972년 3월 22일.
  • 김영상, 『서울명소고적』, 향토사, 1958.
  • 문일평, 『사외이문비화』, 조광사, 1946.
  • 문일평, 『한국의 산수』, 신구문화사, 1984.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81.
  • 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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