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淸道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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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청도군(淸道郡)은 신라의 대성군(大城郡)·오악현(烏岳縣)·형산현(荊山縣)·소산현(蘇山縣)이 통합되어 고려초기에 신설된 고을이다. 고려시대에 청도군은 밀성군(密城郡)의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1109년(고려 예종 4)에 감무(監務)가 처음으로 파견되었고, 1366년(고려 공민왕 15)에는 승격되어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청도군이라 하였으며, 군수(郡守)가 파견되었다. 이후 별다른 변화 없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청도군의 중심지는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청도군은 신라의 대성군(大城郡)과 오악현[烏岳縣: 오구산현(烏丘山縣)이라고도 함. 현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유호리 일대로 추정], 형산현(荊山縣: 현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일대로 추정), 소산현(蘇山縣: 현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일대로 추정)이 통합되어 고려초기에 신설되었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대성군은 경주의 동쪽에 위치하였던 까닭에 후대의 청도군과 상관없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고려초기에 청도군은 밀성군(현 경상남도 밀양시 일원)에 소속되었다가, 1109년(고려 예종 4)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1366년에 지군사로 승격되어 조선으로 이어졌다. 조선 건국 이후 1466년(세조 12)에 지군사는 군수로 개칭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직 및 역할

청도군은 고려초기에 처음 설치되었다. 신라를 합병한 고려는 신라 왕경(王京) 근방의 고을들에 대한 통폐합 조치를 시행하면서 청도군을 신설하였다. 고려는 청도군을 밀성군의 소속으로 편제하였다. 이후 1109년에 감무가 파견되었고, 1343년(고려 충혜왕 4)에 승격하여 지군사가 파견되었으나 1344년(고려 충혜왕 5)에 다시 감무로 환원되었다. 1366년에 지군사로 다시 승격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청도군은 유지되었다. 다만 지군사는 군수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 청도에는 중앙에서 지방관이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청도군수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종4품의 군수와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종4품의 음관(蔭官)이 군수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90명, 인리(人吏) 40명, 지인(知印) 20명, 사령(使令) 30명, 관노(官奴) 35명, 관비(官婢) 31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4품의 군수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에 청도군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서상리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청도군은 연혁 관계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청도군은 대구부(大邱府)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청도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3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청도군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요근, 「통일신라시기의 간선교통로-王京과 州治·小京 간 연결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63,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