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역(靑郊驛)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경기도 개성(開城)의 보정문 밖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청교역(靑郊驛)은 개성부 나성(羅城)의 동쪽 방면 문인 보정문(保定門) 밖에 위치하였다. 고려시대의 청교역은 청교도(靑郊道)의 대표 역(驛)으로서 도읍인 개경(開京)의 관문과 같은 역할을 했던 중요한 역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한양(漢陽)에서 평안도 방면으로 향하는 간선 교통로상의 주요한 요충지의 역으로 중시되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시대 청교역은 한양에서 개성을 거쳐 평안도의 평양과 의주 방면으로 향하는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여 중시되었다. 남쪽의 한양 방면으로는 동파역(東坡驛), 북쪽의 평양 방면으로는 금교역(金郊驛), 서쪽의 해주 방면으로는 산예역(狻猊驛)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청교역이 개경의 관문으로서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이었다. 고려시대 청교역은 22역도 중 하나인 청교도의 대표 역으로서, 중앙의 조정에서 각 지방으로 발송되는 공첩(公貼)을 전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청교역은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실린 22역도 525역 중 청교도 소속의 역이자 개성에 위치한 역으로 기록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교역이 경기우도정역찰방(京畿右道程驛察訪) 소속의 역으로 기록되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경기도의 영서도(迎曙道) 소속의 역으로 편제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변경 없이 그대로 영서도 소속의 역으로 편제되었다. 경기우도정역찰방이 폐지되고 영서도 등의 역도(驛道)가 설치되는 것은 1462년(세조 8)의 일로 파악된다. 청교역은 한양에서 개성과 평양 방면으로 연결되는 간선 교통로상의 역인 까닭에 업무가 많아 청교역의 역리(驛吏)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중종실록』 33년 6월 20일).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청교역도 폐지되었다.

청교역은 현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덕암동의 청교마을에 위치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