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위(僉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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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사위들이 소속된 의빈부(儀賓府)의 종3품에서 정3품의 당하관 봉작명.

개설

조선 건국 직후에 의빈(儀賓)군(君)에 봉작되었으며 명칭도 의빈이 아니라 부마(駙馬)였다. 의빈은 정종 때 군 대신에 후(侯)로 봉작되다가 태종 때 다시 군에 봉작되었다. 그 후 1434년(세종 16) 4월 8일에 공포된 세종의 명령에 의해 부마는 의빈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어서 1466년(세조 12) 1월 15일에 부마부가 의빈부로 바뀔 때 정1품과 종1품의 의빈, 정2품과 종2품의 승빈(承賓), 정3품의 부빈(副賓), 정3품의 첨빈(僉賓)과 종3품의 첨빈 등 4가지의 봉작명이 나타났다. 이 같은 세조 때의 의빈부 규정이 약간 바뀌어 『경국대전』에는 위(尉), 부위(副尉), 첨위(僉尉)의 3가지 봉작명이 실렸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왕세자의 서녀인 현주(縣主)에게 장가든 사람은 종3품의 첨위를 받았고, 나중에 정3품 당하관의 첨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는 이전의 정3품 첨빈과 종3품의 첨빈이 정3품 당하관의 첨위와 종3품의 첨위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정3품 당하관의 첨위는 정순대부(正順大夫)의 의빈계(儀賓階)를 받았고, 종3품의 첨위는 명신대부(明信大夫)·경신대부(敬信大夫)의 의빈계를 받았다.

담당 직무

『경국대전』에는 의빈부의 직무를 ‘공주와 옹주에게 장가든 자들의 관부’라고 하여 왕의 사위만 관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왕세자의 사위도 관장하였다. 실제로 의빈부의 작위를 받는 대상자는 왕의 사위에 더하여 왕세자의 사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의빈부의 작위를 받은 의빈은 실제 직무가 없는 대신 산관(散官)에 해당하는 녹과(祿科)를 받았다. 종3품의 첨위에 봉작되면 곡식 60석, 포 16필, 저화 6장, 과전 55결(結)을 받았다. 본래 조선시대의 양반 관료들은 실직(實職)에 근거하여 녹과를 받았다. 하지만 왕의 사위인 의빈, 왕비의 아버지인 국구(國舅) 등 왕실 구성원들은 벼슬살이가 금지되었으므로 실직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봉작을 받은 왕실 구성원들은 실직에 관계없이 품계에 따라 녹과를 받았다.

첨위와 같은 의빈들은 1년에 4차례 춘하추동의 첫째 달에 녹과를 받았다. 의빈들에게 의빈부의 최고급 작위를 주고 그에 따른 녹과를 지급한 이유는, 의빈의 벼슬살이를 금지하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 최고의 명예와 함께 최고의 경제적 풍요를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변천

1869년(고종 6) 의빈들의 작품(爵品)을 개정하면서 첨위가 종1품으로 격상되었다. 의빈부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에서 의빈원(儀賓院)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의빈원의 작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위, 부위, 첨위로 동일하였다. 다만, 부위는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정3품에서 정1품까지의 품계를 갖게 되었다.

대한제국 멸망 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황실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910년 12월 30일 이왕직 관제를 공포하였다. 이왕직에는 서무계, 회계계, 장시계(掌侍係), 장사계(掌祀係), 장원계(掌苑係) 등 5개의 계가 설치되었다. 이때 의빈원을 비롯하여 종정부, 시강원, 규장각 등은 이왕직의 서무계에 통폐합되었다. 따라서 의빈원의 첨위 역시 일제 때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성준, 『한국중세정치법제사 연구』, 일조각, 1985.
  • 정용숙, 『고려왕실족내혼연구』, 새문사, 1988.
  • 김기덕, 「고려시기 왕실의 구성과 근친혼」, 『국사관논총』 49, 1993.
  • 김성준, 「종친부고」, 『사학연구』 18, 1964.
  • 남지대, 「조선초기 예우아문의 성립과 정비」, 『동양학』 24, 1994.
  • 신명호, 「조선초기 왕실 편제에 관한 연구: ‘의친제’의 정착을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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