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옹산성(鐵瓮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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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영변의 철옹에 축조한 산성.

개설

철옹산성은 평안도 영변(寧邊)에 있었다. 묘향산(妙香山)에서 시작된 천혜의 요새였다. 일명 약산산성(藥山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둘레가 20여 리이다. 1433년(세종 15) 옛터에다 그대로 돌로 쌓았으며, 도절제사 영을 두었고, 도체찰사황희(黃喜)가 성의 터를 정하고 판관이정(李禎)이 역사를 감독하였다.

위치 및 용도

철옹산성은 큰 재[嶺]의 동서를 한계로 지었다. 산성의 동쪽은 큰 낭떠러지의 형세를 이루고 있고 남쪽은 큰 들판을 굽어보아 형세가 몹시 넓다. 산성의 동서남북의 면적이 넓다.

변천 및 현황

1477년(세종 29) 5월 평안도감사가 철옹산성을 맹산(孟山)으로 옮겨 소속시키자는 의견을 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산성은 세 겹으로 이루어졌다. 1669년(현종 10) 좌의정허적이 철옹의 지세가 매우 험하여 적병이 공략하기 어려운 데다 큰길에서 20리(약 8㎞)나 떨어져 있어, 변란을 대비하기에 적당하다며 산성을 수축할 것을 건의하였다. 1683년(숙종 9) 7월에 성을 쌓고 대포를 만들게 하여 이듬해에 마무리되었다(『숙종실록』 9년 7월 16일). 1743년(영조 19) 2월에는 각 군영의 군제의 문제점을 의논하면서 평안도 병영을 철옹산성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다(『영조실록』 19년 2월 12일). 1791년(정조 15) 5월에는 승지이서구가 철옹산성에 비축한 군량미가 없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에 산창(山倉)과 저창(儲倉)의 군량을 창고에 보관할 때 쌀과 콩을 합쳐 2천 섬으로 규정했다(『정조실록』 15년 5월 26일).

형태

철옹산성의 둘레는 27리(약 11㎞)였다. 산성 내에 약산동대(藥山東臺)가 있다(『숙종실록』 9년 7월 16일).

관련사건 및 일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은 철옹에서 도읍까지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무인지경을 들어오듯이 곧장 쳐들어왔다(『인조실록』 2년 3월 20일). 1656년(효종 7) 9월 영돈녕부사김육(金堉)은 단군이 중국의 요임금과 함께 왕위에 올라 태백산(太白山)으로 내려와 철옹에 도읍을 정했다가 패수(浿水) 가로 옮겨 아사달로 들어갔다고 했다(『효종실록』 7년 9월 15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