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여관(鐵道旅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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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철도역 근처에 만든 여관(호텔).

개설

경인철도, 경부철도, 경의철도가 차례로 개통되면서 인적·물적 교류가 증가하였고, 철도역을 중심으로 숙박 수요도 늘어났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는 1912년 7월 15일 부산철도호텔을 시작으로 각 철도역 근처에 서양식 호텔과 식당을 세워 직영하였다. 1914년 9월에는 서울의 철도호텔이 조선호텔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했고, 같은 해에 신의주 철도호텔도 개관하였다. 1922년에는 평양 철도호텔이 개관했고, 금강산 관광 수요의 증가로 1918년에는 금강산 장안사호텔도 영업을 개시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적자가 계속되면서 철도국은 철도호텔을 민영화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3월 조선호텔경영주식회사가 기존 철도호텔 직원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철도국의 위탁을 받아 철도호텔을 위탁 경영했으나 경영이 여의치 않아 1934년에 다시 철도국 직영으로 환원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철도여관(鐵道旅館)은 철도호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17년 순종이 일본을 방문할 때, 부산에 있는 철도호텔에서 오가는 길에 투숙한 적이 있었다. 6월 8일에 특별열차편으로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했을 때 철도호텔에서 하루를 지냈으며(『순종실록부록』 10년 6월 8일), 6월 27일에는 시모노세키[下關]의 슌판로[春帆樓]를 출발해서 부산에 도착했을 때 역시 철도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순종실록부록』 10년 6월 27일). 철도호텔은 철도역이 있는 건물 내에 있거나 근거리에 위치하여 여행을 하는 유명 인사들이 많이 투숙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인철도, 경부철도, 경의철도가 차례로 개통되면서 지역 간 이동 시간이 줄어들고 국내외적으로 인적·물적 교류가 증가했다. 이와 함께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아지고 이들에 의한 숙박 수요가 늘어났지만 마땅한 숙박 시설이 없었다. 특히 서양식 숙박 시설의 경우, 서울까지 철도가 부설되기 전에 적합한 호텔이 없었고, 따라서 외국인들은 소개장을 들고 와서 자기들 나라의 공사관에서 접대를 받는 형편이었다.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불편이 많아지자 철도국에서는 1912년 서양식 설비를 갖춘 여관(호텔)과 식당을 세워 직영하였다.

변천

철도호텔이 처음 설립된 곳은 인구의 이동이 많았던 부산이었다. 부산 철도호텔이 개업한 것은 1912년 7월 15일의 일이다. 1913년 4월에는 서울에도 철도호텔이 착공되어 1914년 9월 20일에 준공했다. 신의주 철도호텔 또한 1914년에 개관하였고, 1922년에는 평양 철도호텔이 개관하였다. 금강산에 대한 관광 수요가 늘어나면서 금강산에서도 호텔 영업을 했다. 1918년에는 금강산 장안사(長安寺)호텔이 장안사의 극락전을 빌려 영업을 개시했다가, 1924년 6월 1일에 다른 임대 별장을 개축하면서 신관으로 이전하여 영업했다. 전자를 금강산 장안사호텔 또는 내금강산장이라 불렀고, 후자를 온정리(溫井里)호텔 또는 외금강산장이라 불렀다. 장안사호텔은 매년 보통 6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였다.

1920년대에는 철도·여객선의 발달로 관광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1925년에는 조선의 중앙역인 서울역이 준공되었다. 1930년대에는 패키지여행 상품과 보험이 등장했다. 이런 추세에 맞춰 국내에 근대적인 형태의 호텔이 잇따라 생겨난 것이다. 호텔과 함께 1915년 서울역 2층과 부산 공회당에서 식당을 직영하였고, 철도의 식당차 영업은 1913년에 경부선과 경의선에서 개시하였다.

1914년 10월 10일에 조선호텔로 개관한 서울 철도호텔의 경우, 독일 건축가 게르르고 데 라단데의 설계로 580평 건평에 지하 1층, 지상 4층 총 52개의 객실, 한식당, 양식당, 커피숍, 로비 라운지, 바, 댄스홀을 갖춘 볼룸, 2개의 별실에 도서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조선호텔은 한국 병합 이후 식민지 지배의 치적을 선전할 목적으로 경복궁에서 개최할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 대비하여 서둘러 착공해서 완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조선호텔은 외국인들이 서울을 찾을 때 으레 투숙하는 곳이었고, 조선경찰협회 발회식, 전도변호사대회, 산업조사위원회 환영회, 전조선은행연합회, 각종 유력자 중심의 간담회 등이 개최되는 명실상부 서울의 최고 문화시설로 자리매김했다.

1929년과 같이 조선신문사 주최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는 4월부터 10월까지 당초 예산보다 약 4만 7,000원이나 수입이 증가된 때도 있었으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항상 적자였다. 철도국 직영의 서울, 부산, 신의주, 평양, 내금강 장안사, 외금강 온정리의 철도호텔과 열차식당은 매년 평균해서 6만 원가량의 결손을 보고 있었다. 생각만큼 수요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1932년 4월 1일부터 실시된 민영화 조치는 계속되는 결손에 대한 대책이었다. 민영화의 내용이란, 철도국이 기존의 건물과 설비를 대여하고 그때까지 철도호텔에 종사하던 사무원들이 별도 회사를 조직하여 위탁 경영 또는 위임 경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철도호텔의 민영화 방침이 발표되자 서울의 여관조합 임원들이 조선호텔 지배인을 찾아 항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하에 1932년 3월 31일에 설립된 것이 바로 조선호텔경영주식회사였는데, 자본금 20만 원에 5만원 불입이었다. 따라서 회사 설립 당시 주식은 공모하지 않았고, 기존 직원 11명이 4,000주를 전액 인수했다. 철도국에서 종래의 건물과 설비를 대여하고 경영에서 나오는 이익은 철도국과 조선호텔경영회사가 반분하기로 했다. 이 회사의 영업 내용은, 호텔 경영 및 이에 부대하는 사업, 정거장 및 열차 내의 식당 영업, 열차 내 물품 판매 및 이에 부대하는 사업 등이었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1933년판에 의하면 조선호텔경영회사는 조선호텔, 평양 철도호텔, 부산 스테이션호텔, 신의주 스테이션호텔, 장안사호텔, 온정리호텔에 대한 위탁 경영과 경성역 구내식당 및 식당차 운영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철도호텔주식회사의 경영 성적이 예상했던 것보다 좋지 않았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이들 사업을 1934년 4월 1일부터 다시 철도국 직영으로 환원하고 신규 예산에 100만 원을 계상하여 서비스 개선을 꾀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도 매년 10만 원의 결손을 예상하고 있어 총독부로서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또한 총독부는 1939년에는 전시기의 시국 사정을 이유로 매년 철도호텔에서 개최되던 크리스마스 만찬회를 철도국의 통첩을 통해 중지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교통부에서 철도호텔을 직영했다. 예컨대, 부산 철도호텔의 경우, 해방 후 미군정이 오랫동안 사용하다가 1949년 2월 13일부터 한국 정부에 반환, 교통부 직영으로 개업하였다. 이후 관광입국의 기치 아래 직영 호텔의 신축과 증축이 이어졌지만 부작용을 많이 낳았다. 일례로 1957년 6월말 현재 세입 면에서 약 40억 환의 결손을 보고 있었던 탓에 교통부에서는 향후 직영 철도호텔 중에서 온양, 불국사, 해운대, 동래 등 4개 호텔을 일반에 위탁 경영하기로 결정했다. 1959년 11월 1일부터는 각지에 있던 철도호텔을 관광호텔로 개칭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총독부관보』 1934년 3월 28일자.
  • 『동아일보』 1920년 6월 25일자, 「금강산호텔 개시, 칠월 일일부터」.
  • 『동아일보』 1924년 6월 1일자, 「장안사호텔 낙성」.
  • 『동아일보』 1932년 2월 30일자, 「철도호텔 등 민영키로 결정, 열차식당까지도 얼러서 연평균 육만 원 손해」.
  • 『동아일보』 1934년 4월 3일자, 「각지의 호텔을 철도국서 직영」.
  • 『동아일보』 1939년 12월 15일자, 「크리스마스 중지, 철도국서 호텔에 통첩」.
  • 『동아일보』 1957년 7월 23일자, 「교통부, 수입 격감으로 고민, 운임 인상·철도호텔 위탁운영 구상」.
  • 『중앙일보』 1932년 3월 29일자(석간), 「여관조합대표 주정(酒井) 씨와 회견」.
  • 中村資良,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동아경제시보사, 1933.
  • 한국여행신문사 특별취재팀, 『한국관광50년비사』, 한국여행신문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