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향각(天香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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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의 전각.

개설

천향각(天香閣)은 창덕궁 금원 안에 있는 전각이었다. 1653년(효종 4)에 효종이 우암송시열과 독대하기 위해 어수당과 천향각을 지었다고 『홍재전서(弘齋全書)』「일득록(日得錄)」에 기록되었다. 천향각이 명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수당과 존덕정 사이의 어디쯤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위치 및 용도

『궁궐지』에 따르면 천향각은 척뇌당의 서북쪽에 있다고 하고, 척뇌당은 애련정의 북쪽에 있다고 되어있다. 애련정 북쪽의 가장 가까운 건물은 「동궐도」 상에서 찾아보면 ‘ㄱ’ 자보다 둔각으로 꺾여, 한쪽은 정자 형태를, 한쪽은 방으로 구성된 작은 초가집 또는 대나무집이다. 애련정의 북쪽에는 심추정과 척뇌당이 있다고 기술하였는데, 「심추정은 죽정으로 단청집보다 좋다」는 숙종의 어제시에 부합해보면 이 집은 심추정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집이 심추정일 경우 『궁궐지』의 기록으로 찾아보면 천향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만일 이 초가집이 척뇌당이라면 서북쪽에 천향각이 있다고 했으니, 폄우사와 폄우사의 남쪽으로 뻗어 나온 담장 끝에 연결된 3칸짜리 일자집이 있어 위치상으로 천향각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심추정, 척뇌당, 어느 쪽도 방향과 주변 상황으로 판단하기에는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일성록』에 따르면 존덕정이 천향각의 서남쪽에 있다고 하여 천향각의 위치를 추정하는 데 혼란을 준다. 그러나 대개 천향각을 이야기할 때 존덕정과 어수당을 함께 거론하므로 폄우사 아래의 3칸 집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변천 및 현황

1653년에 조성되었다. 숙종·정조·순조가 천향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꽃과 풍광에 대해 노래한 시를 제외하면, 천향각에 관한 기록은 정조 때에 내원 즉 궁궐 후원에서 여러 제신과 즐기는 장소로 몇 번 거론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헌종대에 간행된 『궁궐지』에 천향각의 존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까지 잘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1900년대 초에 제작된 「동궐도형」에는 천향각의 자취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시기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형태

형태는 알 수 없다. 다만 존덕정과 어수당 사이에 있어 옥류천의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장엄하게 들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이 피는 장소에 천향각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95년(정조 19) 3월 10일 꽃 피는 봄날에 정조는 54명의 손님을 궁궐 후원으로 불러들였다. 여러 각신은 물론이고 그 아들, 조카, 형제들까지 포함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매년 봄이면 행해졌는데 금원에서 뛰어난 경치와 꽃을 구경하고, 낚시질을 하며, 또한 작은 술상을 앞에 놓고 곡연도 하면서 즐거이 하루를 보냈다. 이날은 어느 때보다 많은 인원이 초청되었다. 정조는 말을 타고 후원으로 향하며 참석한 자들도 모두 말을 타고 자신의 뒤를 따르라고 했다. 주합루 뒤의 어수당 앞에서 내린 정조는 모두 말에서 내릴 것을 명했고, 천향각 앞에 어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경치 구경을 하도록 하였다.

천향각의 북쪽, 존덕정의 서쪽, 태청문 앞에는 담장으로 두른 빈터가 있었는데 이곳에 막차를 설치해두었다. 사실 정조는 이날을 즐기기 위한 자리로 만든 것이 아닌 듯했다. 대신들을 막차로 불러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놓으면서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하던 고사가 있는 장소임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대신들을 예우하며 대접하는 것은 정조 자신을 계발하고 유익하게 하려는 뜻이라 말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이날을 기억하며 자신의 편에 서라는 말을 남겼다(『정조실록』 19년 3월 10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홍재전서(弘齋全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