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千字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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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주흥사(周興嗣)가 한자 1,000자를 열거하고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만들어 놓은 책.

개설

『천자문(千字文)』은 원래 중국 남조 양나라의 주흥사가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 지은 책이다. 한자 1,000자를 열거하고,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만들었다.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필적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았다고 하는데, 더 오래전에 중국 위(魏)나라 종요(鍾繇)의 필적을 모은 것이라는 설도 있고, 종요가 손수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해서 ‘언재호야(焉哉乎也)’의 어조사로 끝나는데, 자연 현상부터 인륜 도덕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글귀를 수록하여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사용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당(唐)나라부터 빠르게 보급되어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희지의 7대손 왕지영(王智永)이 진서(眞書)와 초서(草書)의 두 서체로 만든 『진초천자본(眞草千字本)』이다. 1109년에 새긴 석각이 남아 있으며,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문서에 그 필사본이 많다고 전한다. 송(宋)나라부터는 완전히 정착되어 『속천자문(續千字文)』을 만들기도 하고, 『서고천자문(敍古千字文)』과 같이 전혀 다른 글자를 이용한 새로운 천자문이 생기기도 했다. 천자문의 순서를 이용해 문서 번호를 붙이는 풍습도 생겼다.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일본의 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285년 백제(百濟)의 왕인(王仁)이 『논어(論語)』 10권과 함께 『천자문』 1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백제에는 이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천자문』의 성립 이전이므로 단순한 전설이라는 것, 일부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것, 혹은 또 다른 천자문이라고 하는 것 등의 논란이 있다. 한편 신라(新羅)에는 521년(법흥왕 8)에 중국 남조 양의 승려 원표(元表)가 사신으로 오면서 많은 불경과 『천자문』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용되어 왔으며, ‘天 하늘 텬’과 같이 새김(뜻)과 음을 달아 읽게 되었고 이 석음(釋音)을 단 책이 간행되었다. 지금까지 석음이 있는 『천자문』으로 알려진 가장 오랜 책은 1575년(선조 8) 광주(光州)에서 간행된 것이다. 맨 끝에 ‘만력삼년월일 광주간상(萬曆三年月日光州刊上)’이라는 간기가 있는 책으로, 현재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중앙도서관 소장본이 알려져 있는데 『광주판 천자문』으로 알려져 있다.

1575년(선조 8)에 간행된 책 외에도 『천자문』은 여러 이본이 존재한다. 비슷한 책이 일본의 오히가시하야루기념문고[大東急紀念文庫]에 소장되어 있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이 책에는 간기가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위에서 말한 『광주판 천자문』 보다 조금 뒤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천자문』은 한석봉(韓石峯)으로 유명한 명필 한호(韓濩)의 글씨로 1583년(선조 16) 서울에서 간행된 『석봉천자문(石峰千字文)』이다. 현재 전하는 책들 중에서 경상북도 영주의 박찬성(朴贊成) 소장본과 일본 나이카쿠문고[內閣文庫] 소장본이 원간본 또는 이에 가까운 책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봉천자문』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뒤에도 여러 차례 중간되어 우리나라에서 『천자문』이라면 이 책을 연상하리만큼 일반화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홍성원(洪聖源)이 『주해천자문(註解千字文)』을 새로 간행하였다. 『광주판 천자문』이나 『석봉천자문』은 한자 하나에 하나의 석음만 달았는데, 이 책은 둘 또는 세 석음을 단 경우가 많이 있으며, 이에 더하여 간단한 주석과 함께 250구에 대하여 통해(通解)를 베푼 점이 다르다. 1804년(순조 4) 방각본(坊刻本)으로 간행한 책도 있는데, 이것은 신증본(新增本)이다. 이 밖에 그 현존본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황윤석(黃胤錫)의 저서 『이재유고(頤齋遺稿)』에 『영남인본천자문(嶺南印本千字文)』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조선에 들어와서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에는 『천자문』에 ‘天 하 텬’과 같이 새김과 독음을 달아 읽게 되었고, 이 석음(釋音)을 단 책이 간행되어, 한자 입문서로 널리 이용되었다. 『천자문』은 한자의 자형, 독음 및 의미를 알게 할 뿐만 아니라, 교양으로서 갖추어야 할 중국의 고사를 배우고 글씨를 익히는 교본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래서 안평대군(安平大君), 박팽년(朴彭年),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 당대의 명필이자 저명한 도학자들이 자신의 서체로 『천자문』을 써서 남겼다.

『천자문』은 한자 교육의 기본교재로서도 그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국어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천자문』은 우리나라 한자어의 새김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광주판 천자문』과 오히가시하야루 기념문고 소장본은 16세기에 호남지방에서 행하여진 새김을 보여준다. 그 중에는 다른 어느 자료에서도 볼 수 없는 새김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이 책들의 새김은 『훈몽자회(訓蒙字會)』의 새김보다 전반적으로 옛스러운 특징을 지니고 있어, 고대의 전통이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석봉천자문』의 원간본과 여러 중간본 및 『주해천자문』 등을 비교해 보면, 새김이 역사적으로 새롭게 바꾸어〔改新〕 온 경로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이 여러 책들에 한자음의 차이가 나타나는 점도 특히 주목된다. 『천자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다른 천 개의 한자를 모아 하나의 장편 사언고시를 엮어냈다는 점인데, 『광주판 천자문』에는 ‘여모정결(女慕貞潔)’의 ‘결(潔)’자와 ‘환선원결(紈扇圓潔)’의 ‘결(潔)’자가 겹친다. 그로부터 8년 뒤 출판된 『석봉천자문』에서 한석봉은 ‘여모정결(女慕貞潔)’을 ‘여모정렬(女慕貞烈)’로 고쳐 썼으며, 그 뒤로 나온 『주해천자문』 을 비롯한 대부분의 『천자문』들이 ‘여모정렬(女慕貞烈)’로 썼다.

『석봉천자문』은 거성과 상성에 대하여 각각 한자의 왼쪽과 오른쪽에 권점(圈點)을 쳐서 구분하였는데, 『광주판 천자문』은 이러한 성조 구분 표시가 없다. 그리고 『석봉천자문』에는 ‘ㅿ’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반면 종성 ‘ㆁ’은 정확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는 ‘ㅿ’이 보이고 ‘ㆁ’이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광주판 천자문』과 다른 점이다.

의의와 평가

『광주판 천자문』은 단순히 글씨만을 익히기 위한 교본만이 아니라, 천개의 한자를 모아서 엮은 하나의 장편 사고언시(四言古詩)이자 익히고 새길 만한 경구들이다. 『천자문』은 또한 임진왜란 중 사용하였던 총포의 이름,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에서 볼 수 있듯이 순서를 나타내는 숫자로도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김이홍, 『천자문 자료집』, 박이정, 1995.
  • 안병희, 「천자문의 계통」, 『정신문화』12, 1982.
  • 이기문, 「천자문연구」1, 『한국문화』2, 1981.
  • 이기문, 「천자문 해제」, 『천자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73.
  • 조병순, 「원본 석봉천자문에 대하여」, 『서지학』7, 1982.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