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도설(天命道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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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 정지운(鄭之雲, 1509~1561)이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인 성리학서.

개설

조선 중기의 학자 정지운(鄭之雲, 1509~1561)이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인 성리학서다. 정지운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이다.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인필(寅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며, 김정국(金正國)ㆍ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나중에 이황(李滉)에게서 『심경』ㆍ『역학계몽』 등을 배웠다. 2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 지극한 효심으로 예를 다하였다. 스승 김정국이 죽은 뒤에도 심상(心喪) 3년을 지냈다. 집이 너무 가난해, 끼니를 걸러도 개의치 않았으며, 마음이 바르고 악을 매우 미워하는 성격이었다. 일찍이 벼슬에 천거하는 이가 있었어도 나가지 않고, 사양하였다.

권두에 자서(自序)인 ‘천명도설서(天命圖說序)’, 이황이 수정(手訂)하기 이전의 천명구도(天命舊圖)와 이황이 수정한 ‘천명신도(天命新圖)’가 실려 있고, 권말에는 이황의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와 이식의 발문이 실려 있다.

편찬/발간 경위

1537년(중종 32)에 정지운이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있는 주희(朱熹)의 인물지성(人物之性)에 대한 설(說)을 취하고, 그 밖의 여러 설을 참고해,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문답을 더해, ‘천명도설(天命圖說)’이라 하였다. 그 뒤 1553년(명종 8)이황(李滉)에게 이 도설의 증정(證正)을 청해,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소옹(邵雍)의 『선천도(先天圖)』 등의 도설들을 절충한 고증을 받아, 이듬해에 신도(新圖)를 완성하였다.

초간본은 판본으로 전해지다가, 임진왜란으로 없어졌고, 그 뒤 1640년(인조 18)에 이식(李植)이 민가에서 한 책을 얻어 한진보(韓振甫)가 『구암문고(久菴文稿)』를 간행할 때 함께 펴냈다.

서지 사항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9.2cm, 가로 19.7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정지운이 처음 동생과 성리학을 강학할 때 마땅한 교재가 없음을 한(恨)하다가, 스스로 『성리대전(性理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인물지성(人物之性)’을 참고해서,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원리를 하나의 그림으로 압축하여, 거기에 간략한 해설을 붙인 것이다. 이 소략한 『천명도설』을 스승인 김안국(金安國)과 김정국(金正國)에게 보여, 질정을 요구했지만, 함부로 논할 일이 아니라면서, 후일을 기약하자는 대답을 들었다. 그럼에도 이 도설은 소문 없이 선비들 사이에 유포되었고, 이를 우연히 발견한 이황이 정지운을 만나, 몇 가지 오류와 부적절한 대목을 지적했는데, 정지운은 아예 검토와 수정을 이황에게 의뢰하였다.

이황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주자의 설에 기초하고, 여러 학자의 설을 참조해’ 그림을 고치고, 해설을 수정하였다. 후서의 전반부는 이런 저간의 사정을 차분히 적고 있다. 후반부는 한 과객이 이 같은 저작 행위의 정당성과 내용의 적실성 여부를 따지고, 이에 대해 이황이 답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객이 성현(聖賢)도 아니면서, 어떻게 외람되게 창작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이황은 이 저작이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太極圖)’와 『중용』의 취지에 따라, 종합한 것일 뿐, 새로운 창작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과객이 화를 내며, ‘태극도’가 5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그림은 단 하나뿐이지 않느냐고 따지자, 이황은 둘의 주안(主眼)이 서로 다르다고 대답했다. 즉, ‘태극도’는 창조와 변화의 근원을 찾기 위해, 방법적으로 5층으로 나누었을 뿐, 인물(人物)의 생성과 변화라는 구체성에서 그 그림들은 혼륜(渾淪)의 전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음 질문에서도 과객은 ‘태극도’와 ‘천명도설’의 차이를 음양(陰陽)과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문자의 존재 여부를 두고 따졌고, 이황은 이에 대해 하늘에서가 아닌 인간의 현실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방법적 선택의 결과이지, 주자학의 근본 원리를 다친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 방위의 순서가 서로 틀린 것을 질문하고, 대답을 듣는 과정에서 과객은 처음의 힐난의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린다. 과객은 그림에서 나타난 이황의 인간학적 구상, 즉 심성정(心性情)과 선악의 갈림, 그리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구분에 대해 묻고, 수양에 있어 존양과 성찰을 관통하는 경(敬)에 대해서 물으며, 이황은 이 질문에 또한 자신의 이해를 요약해서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과객은 그렇다면, 이황 당신은 자사(子思)와 주돈이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말이냐고 다그친다. 이황은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성인은 하늘을 희구하고, 현인은 성인을 희구하며, 선비는 현인을 희구하듯”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또 노력하는 사람이며, ‘천명도설’은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일 뿐이라고 대꾸하였다. 이 말에 과객은 부끄러움과 깨달음을 얻고, 문답을 기록하고, 스스로 경책(輕責)했다면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사단칠정분이기’란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갈라서 분속(分屬)시키는 데 대한 왕복논변한 글을 뜻한다. 즉 사단을 이에, 칠정을 기에 분속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그 타당성 여부를 논란한 것이다.

그 발단은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에서 시작된다. 정지운이 “사단은 이(理)에서 발(發)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한다.”고 했던 것을 이황이 “사단이 이의 발(發)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라고 수정한 데서 문제가 되었다.

사단도 칠정도 다 사람의 마음에 관한 것인데, 한 마음의 성(性)과 정(情)이 하나는 이에서 발하고, 다른 하나는 기에서 발한다면, 같은 마음에 근원이 두 곳에 있는 것이 되어서, 조리가 닿지 않는다는 모순을 가져오게 된다.

사우(師友)들 사이에 있던 논란을 전해들은 이황은 다시 이것을 “사단의 발은 순수한 이치이므로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므로 선과 악이 있다.”고 수정해서 기대승에게 대답한 이후 왕복이 거듭되었던 서(書)가 왕복서에 모두 집록되어 있다.

이황은 이의 순수성을 기와는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발(理發)을 기발(氣發)과 구분하려는 것이요, 그렇게 되면 발하는 근원처가 두 곳에 있는 것이 되므로 부당하다는 견해에서 어느 것도 이기(理氣)의 공발(共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나선 것이 기대승이다.

이황의 주장을 호발설(互發說)이라고 한다. 이도 발하고 기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인 것이다. 그 뒤 이황은 재차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는 주장으로 굳어졌다. 정지운이 발언한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는 것이 이황에 의해서, 세 번 고쳐진 것이다.

참고문헌

  • 박성순, 「추만 정지운 저술 『천명도설』의 사상사적 위상」, 『동양고전연구』 제54집, 동양고전학회, 2014.
  • 유정동, 『동양철학(東洋哲學)의 기초적(基礎的) 연구(硏究)』,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5.
  • 정경훈, 「추만 정지운과 『추만실기』」, 『유학연구』 제22집,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0.
  • 정대환, 「추만 정지운과 조선유학」, 『철학연구』 제82집, 대한철학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