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진(天摩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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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삭주군에 설치하여 첨사가 관할하던 진보.

개설

천마진은 평안도 강변(江邊) 7읍(邑) 중 하나인 삭주군에 설치되었던 군사시설이다. 강변 7읍은 압록강 이북으로부터 이민족의 침입을 일차적으로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중에서도 삭주군(朔州郡)은 압록강의 하류인 의주부 인근에 위치하여 월경이나 불법 무역을 감시하고, 불시 침입에 대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8세기 초반 삭주군에는 3개의 진보가 배치되어 있었다. 천마진은 삭주군에서 막령진(幕嶺鎭)과 함께 내지로 진입하는 길목을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삭주군에 속한 3개의 진보 가운데 유일하게 종3품 무관 첨절제사가 관할하는 곳이기도 했다.

위치 및 용도

평안도 삭주군에서 남쪽으로 내지의 도로변에 위치하였다. 천마진에서 삭주군으로 올라가는 데 가장 큰 고개였던 온정령(溫井嶺)까지는 약 4, 50리 거리였다(『정조실록』 5년 12월 17일). 천마진이 소재한 삭주군은 의주부와 창성군(昌城郡) 사이에 있던 고을로서 압록강 건너 청나라와 마주 보고 있었다. 삭주군은 창성군 다음으로 청북(淸北) 지역 방어의 가장 중요한 요해처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천마진은 압록강을 건너 내지로 진입한 적군이 평양과 한양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름길 위에 있었다.

천마진의 주요한 역할은 내지로 외적이 침입했을 경우 도로를 차단하고 방어하는 것이었다. 평안도의 방어체제는 기본적으로 순(巡)·병영(兵營)―주진관(主鎭管)·독진(獨鎭)―진보(鎭堡)―파수(把守)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여기에 지휘체계가 미치기 어렵거나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에는 추가적으로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평안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독진(獨鎭)이 많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적의 침입 경로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다양한 요충지를 독립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삭주군에 소속된 세 진보는 모두 독진으로서 천마진도 독자적인 명령체계로 움직이는 독진으로 운영되었다. 천마진은 인근에 있는 대성령(大城岺)과 소성령(小城岺)을 방어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변천 및 현황

1653년(효종 4) 상단면(上端面)에 임시 주둔하고 별장을 두었다가 1705년(숙종 31)에 첨사진으로 변경되면서 진의 위치도 대소성령(大小城嶺)의 밑으로 옮겨 독진으로 편성하였다. 18세기 천마진에는 첨사 이하 362명의 군병이 배치되었고, 19세기에는 356명이 있었다. 진창(鎭倉) 두 곳이 있는데 양곡은 모두 509석을 보관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 방어체제의 정비」,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진보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46, 고려사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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