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화갑번(彩花甲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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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안료를 이용하여 문양을 그리고 갑발 안에 넣어 번조한 백자.

개설

채화(彩花)는 백자에 문양을 그린다는 의미이다. 이때 사용되는 유하채(釉下彩) 안료로는 푸른색을 내는 코발트, 붉은색을 내는 산화동, 짙은 갈색을 내는 산화철이 있다. 채화갑번(彩花甲燔)은 1832년(순조 32)에 영의정남공철이 검소함과 반대되는 사치한 그릇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다(『순조실록』 32년 9월 15일). 즉 채화갑번 백자는 고가의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그리고 갑발 안에 넣어 번조한, 품질이 좋은 고급 그릇을 의미한다.

내용 및 특징

‘채화갑번’이라는 용어는 1832년에 영의정남공철이 검소함을 숭상하는 일에 대해 왕에게 아뢰면서 선왕인 정조가 검덕(儉德)하여 “그릇은 채화갑번을 쓰지 않고 분원(分院) 상기(常器)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순조실록』 32년 9월 15일).

채화갑번은 금값보다 비싸게 거래되었다는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그린 청화백자를 일컬으며, 검소함과 대비되는 사치스러운 그릇으로 인식되었다. 정조가 사용하였다는 분원 상기는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왕실용 백자를 제작하던 분원에서 갑발을 사용하지 않고 번조한 예번(例燔) 자기를 의미한다.

갑번(甲燔) 또는 갑법(匣燔)은 갑발이라고 하는 내화(耐火) 용기 안에 청자나 백자 등의 자기를 넣어서 가마 안에 재임하고 번조하는 것을 말한다. 갑발 안에 놓인 자기는 가마 안의 여러 가지 불순물로부터 보호될 뿐만 아니라 가마 안의 열기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다. 따라서 갑번은 정교한 형태를 가진 품질이 좋은 고급자기를 번조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또한 갑발을 포개어서 여러 층으로 재임할 수 있기 때문에 품질이 좋은 자기를 한 번에 많이 구워낼 수 있다. 예번은 가마 안 번조실 바닥에 그릇을 놓고 번조하는 방법으로, 분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분원 상기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조선후기에 청 문물의 적극적인 수용과 함께 사치풍조가 만연하면서 채화하거나 갑번한 백자 기물은 사치품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일성록』 1795년(정조 19) 8월 6일의 기록이나 『조선왕조실록』에 분원에서 제작되는 백자에 청화안료를 사용하거나, 기이하고 정교한 형태를 띠고, 갑발을 이용하여 번조한 갑기(甲器)를 사치스런 그릇이라고 규정한 내용을 볼 수 있다(『영조실록』 30년 7월 17일). 특히 정조는 1791년부터 1799년까지 비싼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장식하는 것과 갑번 자기의 제작을 금지하는 명을 여러 번 내렸다(『정조실록』 17년 11월 27일), (『정조실록』 19년 8월 6일).

갑번 자기의 금지 조처가 여러 번 내려졌다는 것은 금령 자체가 별 효과를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이러한 상황이 된 주요 원인은 분원에서 갑번 자기의 제작과 매매를 하는 것에 사옹원 제조를 맡고 있던 종친들이 깊게 관여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1795년에는 사옹원 제조안춘군(安春君)이융(李烿), 서청군(西淸君)이성(李煋), 서춘군(西春君)이엽(李爗) 등이 갑번을 필요로 하는 기교한 형태의 백자 제작을 요구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경제가 발달하면서 분원에서 만들어진 갑번 백자는 품질이 우수하여 높은 가격으로 매매되는 상품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분원 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사옹원 제조를 맡은 종친 중 일부가 상당한 수량의 갑번 자기를 매매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직관(職官)에 사옹원의 제조와 부제조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사옹원의 제조는 네 명으로 한 명은 문신(文臣), 세 명은 종친이 맡고, 부제조는 다섯 명으로 한 명은 승지(承旨), 네 명은 종친이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왕실용 자기를 번조하던 분원은 사옹원의 관리하에 있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사옹원 제조나 부제조를 맡고 있던 종친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유구(徐有榘)가 쓴 『홍재전서』에도 “정교하고 옥처럼 맑고 깨끗한 것을 갑번이라고 하는데, 백성들 가운데 재산이 조금 있는 자들은 갑번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당시에 갑번 자기가 상품으로 유통되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변천

조선백자 제작에서 청화 안료와 갑발을 이용하는 것은 이미 15세기부터 시작된 방법이었다. 1456년(세조 2)에 죽은 세조의 빙모이자 윤번(尹璠)의 아내인 흥령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의 청화백자 지석(誌石)이나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인 ‘백자청화 송죽문 항아리’에는 ‘홍치이년(弘治二年)’이라는 명문이 남아있어서 1489년(성종 20)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도 청화 안료는 중국 현지에서조차 구하기 어렵고 비싼 물건이었다. 따라서 성종 연간에는 대신(大臣)·척리(戚里)들이 중국산 청화백자를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역까지 금지하는 등의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성종실록』 8년 윤2월 13일), (『성종실록』 8년 윤2월 14일). 1498년(연산군 4)에도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금지한 항목 중에 청화백자를 금·은 그릇과 함께 언급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6월 15일). 17세기에는 병자호란 직후에 청화 안료를 구하지 못해서 왕실 연향에서 사용할 화준(畵樽)을 만들지 못하는 등 청화 안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왕실의 연향이나 의례 등에 사용되는 화준, 용준 등의 특별한 그릇을 제작하는 데 청화 안료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18세기 말경인 정조 연간에는 분원에서 청화 안료와 갑발을 사용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795년에 채홍원(蔡弘遠)이 올린 상소에서는, 분원에서 갑번을 하기 시작한 지 30~40년이라고 하며, 분원에 속한 관리들이 갑번으로 기이하고 정교한 모양의 그릇을 많이 제작하여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갑번을 일절 금지하여 숭검지덕(崇儉之德)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정조는 채화갑번을 금지하였고, 이는 1790년대 후반에 청화백자의 제작을 감소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미 좋은 품질과 다양한 형태의 자기에 대한 수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조의 도자 정책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점은 조선후기에 북학파 학자들, 특히 중상주의적 입장을 보였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용후생학파 실학자인 이희경(李喜經)도 정조가 검소함을 숭상하여 갑기를 금하고 화려한 채색을 없애니 부호들이 조선 그릇은 사용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 자기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으며, 조선에서 만든 백자 그릇은 더 거칠어지고 품질이 나빠졌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광주(廣州) 관요(官窯)에서 갑발을 씌워 구운 것이 제일이고, 갑발을 씌우지 않은 것이 그다음인데, 둥근 형태는 잘 되지만 십각이나 팔각 형태의 각형(角形) 자기는 갑발을 사용해야 제대로 제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후 19세기에 사각, 팔각, 십각 모양 등 각양각색의 그릇이 유행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그릇 제작이 더욱 필요해졌고, 갑번 자기를 더욱 많이 생산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설수외사(雪岫外史)』
  • 『홍재전서(弘齋全書)』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최공호, 「조선초기의 공예정책과 그 이념」, 『미술사학연구』 제194·195, 한국미술사학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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